'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47건

2010. 11. 23

 

'거 참, 공식이 딱 맞아 떨어진단 말이야.'

'네? 무슨 말씀이신지?..'

'과거를 기억해 낼때는 눈동자가 왼쪽으로, 없었던 일을 상상할때는 오른쪽으로. 방금 네 눈이 그렇게 움직이네. 왼쪽으로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별 것 아닌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잠시 생각좀 했을 뿐인데 뭔가 몹쓸 것을 들켜버린듯이 부끄러워졌다. 딱히 숨기고 감춘 것은 없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내 앞의 그가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이 오묘했다.

 

신발을 벗고 마주앉은 밥상의 오른쪽으로 상이 둘이나 더 있었지만 때를 넘긴 저녁시간에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의 한적한 일식집이라 더 이상 들어오는 손님은 없다. 이따금 바깥 홀의 소음이 살짝 방해가 되기도 했지만 시선을 가려주는 미닫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은 분리되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으나 마치 식당 하나를 전세내어 둘만의 식사를 하는 것 같은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다. 고급 일식집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일식집인데 밥상 위에 날생선은 한 조각도 없다. 먹어줄만한 탕요리 하나, 잘못 먹었다간 입천장이 다 벗겨질법한 바싹 구워진 생선구이 하나. 그나마도 오고가는 대화때문에 밥그릇은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상태였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오고간다. 남자의 중저음이 낮게 깔리고 나면 여지없이 거의 같은 길이의 분량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다시 남자의 중저음이 리드를 한다. 말이 끊기기가 무섭게 여자의 목소리가 빠른 템포로 따라붙는다. 잠시 틈을 두고 남자의 중저음이 짧게 되받아친다. 이번에는 조금 더 틈을 두고 여자의 목소리가 더 짧게 맞받아친다. 여자의 목소리는 꼬박꼬박 대답을 한다. 혼자서 경쟁하듯 말꼬리를 놓치는 법이 없다. 남자의 중저음은 급할 것이 없다. 계속해서 말소리가 오고간다.

 

'어떤 여자가 결혼을 하고 애를 셋이나 낳았지. 그런데 하루는 기분이 좋지 않다고 방에 쳐박혀서 울고 있었어. 남편이 와서 얘기했지. 여보, 이제 그만 울고 나가요. 오늘 우리 셋째 생일이잖소. 여자가 대답을 했지. 그쵸. 내가 잘못하고 있는거죠. 내가 나쁜 년인거죠.'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면 안되요?'

남자는 대답이 없다. 여자는 이런 선문답같은 대화는 익숙치않을뿐더러 불편하다. 이 두사람 밥상머리에서 밥은 안먹고 뭐하고 있는건가. 심기가 불편하니 속이 메스꺼워진다.

 

결국 밥그릇은 둘 다 비우지 못했다. 반찬접시도 남겨진 채 그대로다. 뚝배기 안에 뱅 둘러 찬 벌거죽죽한 탕의 가장자리는 바짝 말랐다. 생선구이는 애초부터 구리구리한 갈색이었고 촉촉함을 잃은지 오래다.

 

미닫이 문이 드륵 열리고 분리되었던 이쪽과 저쪽이 다시 만났다. 무엇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합이 만오천원. 유리문 모서리에 달린 말라비틀어진 생선구이 색깔의 작은 종이 땡그랑 울린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건조한 찬 공기가 여자의 콧구멍으로 스륵 하고 빨려들어가더니 순간 명치끝이 저릿한다. 여자는 불편함에 왼쪽 윗배를 움켜잡는다. 뭔지 모를 억울한 덩어리들이 울컥 올라온다.

'왜그래? 어디가 불편하니?'

'그냥 좀 속이 안좋아서요.'

앞서 가던 남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질문한다. 그러고 나서는 배를 움켜쥐지 않은 여자의 왼손을 당겼다 놓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다. 정 못견디겠으면 그냥 게워내라.'

'네. 그래볼게요.'

남자의 중저음은 변함이 없다.

 

곧 여자는 남자의 지시대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좌변기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는다. 먹은 것이 없으니 딱히 나올 것도 없는데 게워내라 하였으니 그렇게 한다. 공연히 쿠르르릉 아까운 수돗물만 하수도를 향한다. 

 

 

 

2011. 7. 28 

 

영화 Mr. Nobody

아주 우연이었다. 지구상의 마지막으로 죽는 인간. 주인공에게는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노란 금발의 생머리의 여인이 울고 있다. 셋째 아이의 생일이다. 주인공은 우리 막내의 생일이라며 그 여인을 달랜다. 울먹거리던 여인은 그럼 나 지금 나쁜 엄마인거지 하며 거실로 뛰쳐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미친듯이 깔깔거리고 떠들며 즐거운 생일파티를 한다.

 

여자는 이제서야 암호를 풀었다. 암호를 푼 것과 동시에 주문에 걸렸다. 아직 있지도 않은 셋째 아이 생일에 울고 자빠져 있는 그 여인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때 남자는 왜 그 이야기를 한 것인지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나는 주문을 풀기 위해 지난 삼십년동안 축적된 지식을 총동원해보았지만 풀어낼 수가 없다. 도대체 셋째아이 생일날 울고 자빠져 있는 나쁜 엄마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해답에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2011. 8. 15

 

셋째 아이 생일에 울고 나자빠져 있는 나쁜 엄마가 되는 주문을 푸는 법을 찾았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그 남자의 아이를 셋이나 낳을 필요도 없고, 그러면 그 남자와의 셋째 아이의 생일에 울고 있을 필요도 없는 거였다. 답은 찾았지만 개운하거나 유쾌하지 않다. 주문을 풀기 위해서는 다른 남자가 필요해 진 것이다. 씁쓸하다.

 

'막 지어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님 달님 별님  (0) 2012.07.09
누나의 일기장(6)  (0) 2012.06.08
누나의 일기장(3)  (0) 2012.06.02
누나의 일기장(2)  (0) 2012.06.02
가위(1)  (0) 2012.01.03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2011. 4. 9

주말 오후에 차를 끌고 나오는게 아니었다. 몇 년 만에 엠티 따라간답시고 오지랖을 부리는 바람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 맞는 서른번째 생일을 앞두고 스스로 준비한 생일선물 여행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출발 한시간 전까지 망설이긴 했지만 이미 계획된 일이었고 사전에 연락을 취해둔 사람들도 있으니 그대로 진행할 수 밖에 없다. 운전에 익숙해졌다고 아무리 합리화 해봐도 내 덩치에 suv는 좀 무리스럽긴 하다. 이런 몽롱한 정신으로 운전대를 잡는 건 사실 범죄에 가까웠다. 그래도 대한민국이 발급해 준 면허도 있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니 객관적으로는 아무 문제될 것 없는 상황이었다.

 

해지기 직전에 출발했지만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금세 어둑어둑해져버렸다. 평균 시속 35km의 속도는 좀 많이 어중간했다. 이건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것만 못하다. 아 졸려.... 까딱 잘못해서 정신줄 놨다가는 큰맘 먹고 출발한 여행이고 뭐고 렌트한 차에 스크래치내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게 생겼다. 대책없는 인생이다.

 

아직 휴게소 들어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졸리다 못해 졸도해버릴 것 같다. 앞서가는 차의 후미등과 브레이크등이 정신을 교란시킨다. 살짝 토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정말 답이 안나온다.

 

노래라도 들으면 좀 나을까 싶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각성에 꽤 효과가 있는 곡으로 치자면 심성락 연주곡만한 것들이 없다. 아코디언의 음색이 졸지마라고 경고를 해준다. 고마울 따름이다. 하필 이럴때 혼자 여행이라니. 조수석에 누구 하나라도 앉아 있었더라면 얘기라도 두런두런 해가면서 어떻게든 겨우겨우 갈 수 있을듯 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지금은 누구라도 사람의 목소리와 단 몇마디라도 나눠야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겠다. 생존은 중요하다. 전화번호 몇 개를 꾹꾹 눌러보지만 토요일 저녁에는 다들 바쁠수 밖에 없다. 어 나야. 나 운전 중인데 너무 졸려서 그냥 걸어봤다. 야, 안돼!!! 빨리 휴게소 들어가!!! 사고나면 어떡할라고!!! 대본을 읽어내리듯 판에 박힌 대화가 몇차례 오고간다. 사고나면 어떡할라고. 그래 나도 알지. 근데 휴게소가 넘 멀다구. 휴게소 들어갔으면 내가 전화했겠냐. 한숨밖에 안나온다.

 

그때 어쩌자고 너에게까지 전화를 한 것인가.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잘지내니?'

운전 중인데 휴게소는 너무 멀고 너무 졸리다고 하지 않았다.

 

'회사는 왜 그만 뒀어요?'

'뭐? 니가 그걸 어떻게 알어? 내가 얘기했었나???'

앞뒤 잘라먹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바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지난 번에 얘기했잖아요. 회사그만뒀다고.'

'그러니까 그걸 언제 얘기했냐고. 아 뭐지? 뭐 살다보면 사람이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는거야.'

좀더 세련된 말들이 필요했지만 이미 혼미해진 정신에 그럴 경황이 없다. 그냥 좀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기분전환도 필요하다고. 그런 연후에야 사람이 살다보면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는거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는 그냥 안부가 궁금해서 걸어봤다고 잘지내라고 하고 끊었어야 했다.

 

'내가 좀 정리가 안되긴 하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어. 무슨 말인지 이해안되도 되묻지 말고 알아서 들어. 내가 좀 그러니까. 이게 이상하긴 한데, 니가 보고싶은 거 같아. 근데 그게 진짜 보고싶은건지 아니면 그냥 잠깐 그런건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계속 생각해볼꺼야. 그러니까 앞으로 한 달, 아니 반년정도 지나도 계속 보고싶으면, 그러니까 잠깐 그런게 아니면 한 번 좀 봐도 될까? 아 뭐 당연히 니가 괜찮으면 보는거지.'

 

툭 뱉어놓고도 너무 해괴망측해서 어디 숨어버리고 싶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그것도 운전 중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저... 교환학생가요. 다음 학기에'

대화에 ABCD가 없다. 징검다리 건너듯 띄엄띄엄 이게 무슨 짓인가.

 

'뭐? 교환학생? 어디로?'

'페루요.'

'뭐? 페루? 거기 남미아냐?'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우리나라보다 한참 못사는 나라래요.'

'야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돼. 세상 어딜가도 다 배울게 있는거야. 더군다나 너 지금 교환학생 가는거라며. 그럼 배우러 가는거잖아.'

'네 뭐 그렇긴해요.'

'그래. 그럼 영어만 하지 말고 그 나라 말도 좀 배우고 잘 지내다 오면 되지. 근데 얼마나 있다 오는데?'

'2년 뒤에 와요.'

'뭐? 2년이나? 언제가는데?'

'7월이나 8월쯤에 갈거예요.'

 

2년. 당황스러운 기간이다. 한학기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2년이라니.

안그래도 머리 속이 뒤죽박죽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불현듯 성냥불이 탁 켜지듯 생각나는 것이 있다.

 

'참, 너 여자친구가 뭐래? 그렇게 2년씩이나 그렇게 멀리 간다는데 뭐라고 안해?'

그게 왜 궁금한데? 미친 게 분명하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라구.

 

'여자친구랑 같이 가요. 양가 허락 받았어요.'

 

양가 허락 받았어요.

양가 허락 받았어요.

 

난 무슨 짓을 한걸까.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거야. 이제 그만 멈춰야 된다. 나도 그걸 안다.

 

'아 그렇구나. 잘 됐네. 멀리 혼자 가 있는 것보다 둘이 가면 외롭지는 않겠다. 다행이네.'

'네. 그렇겠죠.'

미친년. 별 지랄을 다 한다. 이 무슨 낯뜨거운 오지랖이냐.

 

'누나'

'어, 말해. 하고 싶은 말 있음 해.'

'.....................'

'말 하려다가 안하고 뜸들이면 궁금하잖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되.'

'.........아니예요.'

'어. 그래. 뭐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

 

말은 오고가지만 어떻게 수습할 방법은 없고 어색함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제 연락한다고 안할거지?'

'.....'

'대답해.'

'네..'

'그래. 그럼 이걸로 정리하자.'

'네..'

'잘 살아라.'

'네..'

 

 

 

그때 마지막으로 네가 나에게 하려했던 말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겠지.

'막 지어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님 달님 별님  (0) 2012.07.09
누나의 일기장(6)  (0) 2012.06.08
누나의 일기장(4)  (0) 2012.06.03
누나의 일기장(2)  (0) 2012.06.02
가위(1)  (0) 2012.01.03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2012. 2. 21

 

'지은아'

 

이름 석자 불러주었을 뿐이었는데 순간 세계는 재구성되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메시지를 확인하다 그 조그만 화면에 내 이름이 그렇게 턱하니 던져져있다는 것에 흠칫 놀라 누가 '아이스케키'라고 하며 치마라도 들춘 마냥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생각해도 내 뺨따구가 너무 후끈거려 민망하기 그지 없어 그 짧은 순간 동안에 걷는 속도를 늦추고 앞뒤좌우를 살폈다. 당연히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저 나 혼자만 인식한 새계의 재구성. 햇빛의 색깔이 착, 하고 반짝거렸다 멈추었고 저 앞에서 나를 향해 흘러오던 공기들이 움찔, 하면서 주춤거렸다. 발을 딛고 있던 땅도 살짝- 아주 살짝 꾸궁하고 내려 앉았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다른 층에 도착한 것 같은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아직까지 그로부터 단 한번도 지칭되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우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어색한 그와의 사이에서 우리는 굳이 서로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그냥 말을 걸면 대답을 하고 바쁘면 놓치고 지나가는 그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냥 그 정도 거리의 사람.

 

그는 확인했다.

'내가 너를 지은이라고 부른적이 있나? 실제로'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만약 그랬었다면 그 순간 세계가 재구성되는 미묘한 흔들림을 느끼지 않았겠지. 그 진동은 시작이자 처음을 알리는 거였다. '한 번도 불림당한적 없는 것 같은데요' 나는 기억을 쥐어짜낼 필요도 없이 단호한 뉘앙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저 흔한 이름이었다. 다만 최근에 특별해졌다면 누구나 다 아는, 대중의 사랑을 듬뿍받는 유명 연예인의 본명과 같아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자체 신상털기를 해보아도 내 개인에 대해서는 찾아낼 수 없는 그 흔해빠진 이름 석 자. 뭐 별 볼 것도 없는 그 이름 석 자가 어느 순간 특별한 개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은아'

여물먹는 동물처럼 다시 끄집어내어 반추해보았지만 아까와 같은 울림은 없다. 내 스스로 내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지은아'

또 한 번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내 이름을 되새김질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고로 이름이란 것은 누가 불러주었을 때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름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어색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 뜬금없어서 확인하기로 했다.

그는 갑자기 그냥 생각이 났다고 했다. 자신이 나를 불러보거나 먼저 말을 걸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고 했다. 그러나 생각이 났다는 건 좀 말이 안됐다. 생각이란 것은 있었던 일이나 상황에 대한 기억인 것인데, 예컨데 내가 매번 먼저 너에게 말을 걸곤 했다. 라고 생각하거나 기억해낼수는 있어도, 나는 너에게 먼저 말을 걸어본 적이 없다. 라고 기억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지금 발생하지도 않았던 일에 대해 생각이 났다고 표현하고 있는 거다.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때가 되어 잠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점심을 먹었는지, 오늘 누군가와 약속이 있는지를 궁금해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질의 것이다. 기억의 구성. 수동적이지만 나의 세계의 재구성은 그의 기억의 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의 새로운 세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다.

 

 

2012. 2. 22

고등학교까지의 정규 교육을 무난히 마쳐 놓고 이제서야 생각이 났다.

 

바로 문제의 발단이자 원인이자 해설서인 김춘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어떤 법칙이 절대적이려면 그의 역도 성립해야 하는 법이다. 이 독한 시는 피아를 바꾸어도 성립이 되고만다. 이름이란 그런 것이다. 없는 꽃도 만들어 내는 것이 이름인게다.

 

세계가 재구성 된 그 순간, 나는 그 세계의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막 지어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님 달님 별님  (0) 2012.07.09
누나의 일기장(6)  (0) 2012.06.08
누나의 일기장(4)  (0) 2012.06.03
누나의 일기장(3)  (0) 2012.06.02
가위(1)  (0) 2012.01.03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오늘 질문을 한가지 받았다.

"너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 가슴, 배 중에 어디가 아프니?"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눈이 빠질 것 같다고 대답했다.

물어본 사람도 잠시 고민하다가 눈은 머리에 가까우니 그냥 머리라고 생각하자며 설명해주었다.

스트레스 받으면 머리가 아픈 사람은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되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 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운 사람은 감정이나 마음을 어쩌지 못하면 힘들어 하는 사람이라 했다.

배가 아픈 사람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에 문제가 생길 때 힘들어 하는 사람이라 했다.

그러면서 내가 머리가 아픈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이 다소 의외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따져보니 스트레스 받아서 두통이 왔던 기억은 크게 없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별다른 문제 없다 싶으면 받아들이는 편이었던 것 같다.

내 사람이 아닌 그가 보고싶었던 옛날에는 가슴이 미어졌던 적이 있었다.

명치 끝에 송곳이 하나 쑤욱 밀고 들어오듯이 기절할 것 같다가 심장이 커터칼로 난도질 당하는 것 같다가 종국에는 갈비뼈들이 사방으로 뚫고 나갈 기세였다. 많이 아팠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최근에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뭘 먹어도 장이 꾸굴거리고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드물게는 두개골 속의 뇌수들이 터져나가는 듯 하면서 갈비뼈도 삐그덕거리고 참새 눈곱만큼 먹었던 걸 다 게워낸 적도 있긴하다.
사람으로 할 짓이 못되었다.

이제는 머리 가슴 배 중 어디가 좀 불편해도 어렴풋이 짐작하며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을것 같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준비하자.

근데 눈은 왜 빠질 것 같은거지?

'Pulmaya 사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황  (6) 2012.06.24
test  (0) 2012.06.24
거듭나기  (6) 2012.03.09
중국도착보고  (3) 2012.03.05
어떤 시인  (8) 2011.08.09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강령개정안에 대한 토론 요청이 있는지 확인해주십시오."
"강령개정안에 대한 토론 없습니까?"
"그러면 바로 표결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의사 진행 발언 있습니다."
"그러면 강령개정안 심의 의결에...."
"의사 진행 발언 있습니다."
"의사 진행 발언 들어주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진행요원께서는 의사 진행 어떤 의사진행인지 확인해주십시오."
"빨리 확인해 주십시오."

 

"회의 성원에 상당한.... 문제제기가 되고 있습니다."
"마이크 꺼주세요. 마이크 꺼주세요."

 

"자 강령개정안에 대한 반대있습니까 여러분?"

"그러면 '만장일치'로 가결할까요?"
"자 강령개정안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땅땅땅"

 

 

2012년 5월 12일 일산 킨텍스, 민주주의 사망일로 선언합니다. 땅땅땅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사면

Pulmaya 머릿속 2012. 5. 14. 00:29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는 아니지

꽤 오랫동안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인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그렇지 못하냐고 독하게 괴롭혔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왜 너는 나를 사랑하냐고. 징그럽다고. 그만하라고.

나의 사랑은 추하고 비뚤어진 것이었다.

어느 순간 그것을 내려놓고 깊고 긴 고민에 들어간다. 사랑은 뭘까? 사랑하면 어떨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요소
신경쓰임
보고싶음
배려
고운말
의리
양보

꽤 오랜 시간 끝에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지난 날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1번과 2번 까지만 해당되는 '감정'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충격이다.

그리고 다시 곰곰이 따져본다.

신경쓰임
보고싶음
배려
고운말
의리
양보

이 기준대로라면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물론 불완전하지만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긴하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태어나서 처음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안된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산다고 했다. 나는 네가 사는 그 세계는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보기 겁났다. 진짜 다른 세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는 아니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참 서글픈일이다. 밤새 펑펑 울고 싶을 뿐이지만 그냥 훌쩍이며 자리에 눕는다. 내일 출근해야 되니까.....



오늘 부로 죄인들은 모두 사면되었다

'Pulmaya 머릿속'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서  (0) 2012.08.26
그런 날  (0) 2012.07.20
계란 한 판  (2) 2012.04.26
독자  (2) 2012.02.08
센서  (2) 2012.02.05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계란 한 판

Pulmaya 머릿속 2012. 4. 26. 21:42
마트에서 삼십개짜리 계란 한 판 사서 계란 위로 다시 계란판 덮고 가는 노끈으로 동동 묶어서 조심스레 들고 집에 와서 식탁 위에 올려 두고 한 숨 돌리고 냉장고 문 열고 하나씩 하나씩 꺼내 집어 넣다보면, 그 중에 꼭 한 두 알은 살짝 금이 가 있거나 무언가에 콕 찍혀 빼꼼히 구멍이 뚫려 있거나 심지어는 반틈이 쫙 갈라져 당장 계란후라이라도 해먹지 않으면 여엉 버리게 생긴 것도 있고 어떤 날은 무엇에라도 홀린 듯이 손에 힘이 툭 빠져버려 그대로 바닥에 탁 떨어뜨려 깨먹는 날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 요놈의 남은 계란들 죄다 못쓰겠구나'하고 내다버리는 법은 없지.

이제 다시 새로운 판에 계란 한 알 조심스레 얹으며 다짐한다 어떤 해는 맥반석 계란이 어떤 해는 훈제란이 어떤 해는 요즘은 보기도 힘든 메추리알이 또 어떤 해는 어디서 왔는지 출처도 알 수 없는 오리알이 떡 하니 올라가 앉아 있을지도 모를 또 하나의 새로운 계란 한 판을 조심스레 모시고 가며 누가 뭐래도 내 인생이니까, 나는 그래도 나를 섬겨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내 나이 꽉 찬 만 서른 하고도 보름!

'Pulmaya 머릿속'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런 날  (0) 2012.07.20
사면  (2) 2012.05.14
독자  (2) 2012.02.08
센서  (2) 2012.02.05
갈비뼈  (0) 2012.01.11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가깝고도 먼 남의 나라에 도착한지 딱 일주일.

30년 인생에서 참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폰이 고장나는 바람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 속이 하얗게 리셋되는 경험도 해봤고...

오기전에 생각하고 왔던 계획들은 판판이 다 깨지고,

또 생각치도 않았던 새로운 기회도 눈 앞에 턱 떨어졌습니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상황과 환경이 아닌, '나의 태도'였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그저 '주변인'으로 살고 싶다는 어줍잖고 같잖은 마음가짐이 문제였던거죠.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고 (심지어는 내 자신조차도)

눈치 슬슬 보다가 얹혀가고 싶어했고

좋은 것만 취하고 싫은 건 죽어도 싫다고 버티고

과정없이 결과만 있기를 바라고

일일이 나열하면 한도 끝도 없을 민망한 치부들과 마주하고 나니 괴로움은 잠시고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군더더기와 가지를 치고나니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도망다니지 말고, 정면승부 할 것'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가진 것이 별로 없었으니 참 다행입니다.

조금 더 묵묵하고, 무거워지고, 신중해지고, 차분해져서 돌아가겠습니다.

'깨닫기만 하면 바뀌는데는 채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낮아지면 평평해지고, 평평해지면 넓어진다'

이제야 무슨 뜻인지 조금 알겠습니다.

진심으로, 다들 너무 보고싶습니다.





# Today's SPCL
우연한 기회에 네팔에서 썼던 글을 이제서야 올려봅니다.

-네팔에서의 석 달

네팔에 다시 온 지 오늘로 꽉 찬 석 달이 됐다. 작년 이맘때 얼떨결에 보름 여행을 하는 동안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에 한국인 부부를 만났는데, 참으로도 묘한 인연이 되어 그 집은 아예 네팔에 터를 잡고 살고, 나도 덩달아 조카님들 겨울 방학 무렵 다시 네팔에 오게 되었다. 언니와 형부가 한국에 계신 동안 애 셋의 돌봄을 받으며 혹독한 겨울을 봄날처럼 보내는 중이다.

네팔이라는 나라는 외국인 영주권이 없어 여행객이나 교민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라 한다. 1년에 2만 명에 가까운 여행객에 비해 터를 잡고 살거나 봉사활동으로 장기 체류하는 사람은 500이 조금 안되는데, 난 이도저도 아닌 주변인이나 다름없다. 작년 봄, 잘 다니던 회사까지 때려치고 무슨 굼벵이기운이 들어 집에서 뒹굴거리며 잉여의 여왕이 되기를 갈망하던 처지나 지금의 처지나 이도저도 아니긴 매 한가지다.

사람 일이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정말 내가 여기 네팔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한 살 더 먹게 될 줄이야. 여행자의 처지보다는 자연상태의 칩거백수에 가깝다보니 해외라 하더라도 크게 낯선것이 없고 이미 두 번째이니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것들이 더 많아진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스스로는 요즘 해외은둔형외톨이라 칭한다.)

그래도 생활 면면을 쪼개어 살펴 보자면, 3층집 옥상에 가끔 빨래 걷다 보면 저멀리 북쪽으로 산꼭대기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히말라야의 장관이 여기가 바로 네팔이라는걸 확인시켜준다는 정도? 또 하나는 아직 전기 사정이 열악해 해가 지고 정전이 되고 나면 골목길도 깜깜해져 바로 옆집 수퍼라도 갈라치면 손전등을 켜고 다녀야 할 정도인데, 그럴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 보면 정말 말그대로 별이 쏟아질 것 같다. 작년 안나푸르나 트레깅 중에 보았던 밤하늘은 빈 공간 보다 별이 더 많았었고, 여기 카트만두 밸리의 하늘은 그때와 비교해보면 상대도 안되겠지만 그래도 한국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여름 하늘 정도는 되니, 새삼 빛도 공해가 된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여행 왔을때는 문명의 손길이 다소 덜 탄 자연의 느낌이 마냥 좋았는데, 살아보니 참으로 고생스럽다. 여기 네팔은 아니지만 인도에 나와 있는 후배와 메신저로 이야기를 하는데, '개판과 평화의 어중간함'이라는 표현을 듣고는 참 적나라하면서도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에 혼자 한참을 눈물나게 웃었다. 시스템은 우리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게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집집마다 알록달록 꽃도 키우고, 골목길에 멍멍이들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모습과 현지인들의 시골 사람들같은 수더분함은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평온함이었다.

대부분의 전기는 수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는데 건기인 요즘은 하루에 전기가 열여섯 시간씩 나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 앞판을 열어야 볼 수 있는 커다란 배터리를 집에 놓고 전기가 들어올때마다 충전해 쓰는데, 그나마도 간당간당해지면 집안에 전등과 콘센트는 다 뽑고 오로지 무선인터넷만 켜놓은 채로 스마트폰을 쓰고 노트북을 쓰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우리나라같은 온돌 시설이 없어서 낮에도 집 안이 바깥보다 더 추운 단열이 거의 안되는 집들이 허다한데 겉모습은 인도나 홍콩식의 서양식 주택을 따라 지어 겉으로는 세련되고 이색적으로 보였지만 살아보니 창고에서 침낭 펴 놓고 오리털 내피 입고 들어가 자야하는 꼴이다. 이래서 살아봐야 아는가 보다. 여행자의 느낌과 생활인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도로는 우리와 반대로 자동차 좌측통행이다. 거기까진 괜찮은데, 도로의 반이 비포장이다! 여기는 그래도 나름 수도인데!!! 처음 와서는 좀 돌아다녀 보겠다고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 열심히 연습해서 끌고 나갔다가 비포장 도로 위를 한 30분 지나고는 하반신이 마비되는듯한 통증을 느끼고는 포기했다.

여기도 실업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낮에도 길가에는 체스나 마작같은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고 관광산업이 국가 수입 대부분을 충당하고 외국의 원조로 자동차 도로를 닦는 실정인데, 어떻게 다들 굶어 죽지는 않고 살까 생각했는데 도시인데도 집에서 닭키우고 텃밭에 채소 심어 가꾸는걸 보니 식량은 자급자족을 많이 하나보다. 우리 앞집은 청둥오리도 네마리나 있었는데 요즘 안보이는걸 봐서 잡아 먹은 모양이다. 나도 여기 와서 집에서 닭을 두마리나 길러서 순차적으로 잡아 먹었는데, 일단 잡기는 이웃집에다 비용을 지불하고 잡았지만 손질은 내 몫이었다. 암탉 뱃속에 아직 나오지 않은 달걀이 몇개씩 있는걸 태어나서 처음봤고, 본능적으로 모래주머니를 찾아 깨끗이 씻어서 구워 소금간에 찍어 먹으며 잠시 행복하다는 생각도 했다. 고기 값은 우리나라에 비해 싼 편이라 돼지고기 1kg에 우리돈 3천원정도인데, 뼈와 비계, 껍데기의 구분없이 무게로 달아서 팔고 있었다. 나도 한국에서는 엄마가 해주시는 밥 얻어 먹으며 곱게 자랐는데 여기와서 처음으로 식칼들고 돼지고기를 해부수준으로 난도질 해봤다. 한국에서는 정말 손쉽게 먹었던 단무지, 짜장소스, 팝콘을 원재료 단계에서부터 만들어 먹다보니 내 입에 들어갔던 수만가지 음식들이 어디로부터 왔을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그리 손쉽게 먹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역시 고생을 좀 해봐야 배운다.

수십만명이나 된다는 신들이 벽에 조각된 사원이나 알록달록 그림을 그린 트럭같은 이국적인 풍경은 일찌감치 익숙해지고,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문제의 고달픔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물론 옥상에서 보는 히말라야와 상쇄된다 하더라도 힘든건 힘들다.

그래도 한국이 좋으냐 여기가 좋으냐 이분법적으로 자문해보면 아직은 네팔이 좋다. 이따금 담을 넘어오는 이웃집의 향피우는 냄새는 생활에서 오는 피로를 씻어줄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편하게 해준다. 한국에서는 경험할 기회조차 없었던 전기부족과 깨끗한 물 부족은 약 30년 내 인생에 얼마나 불필요하게 지구자원을 낭비했던가 반성하게 한다. 또 스스로 일상생활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매사에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수고에 참 편하게 살았다 싶다. 아직 고생을 덜했나보다. 정말 한국의 모든 것이 그립고 아쉬운 때가오면 미련없이 떠나겠지. 그러고 다시 한국에서의 일상에 적응하면 히말라야의 설경과 늘어지게 낮잠자는 멍멍이를 그리워하겠지. 몸은 어느 곳에 있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너그럽고 즐겁게 살아야겠다.



'Pulmaya 사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test  (0) 2012.06.24
머리 가슴 배  (2) 2012.05.24
중국도착보고  (3) 2012.03.05
어떤 시인  (8) 2011.08.09
  (4) 2011.07.11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중국에서 티스토리 접속 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주 잘되네요!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안됩니다;;;

일단 도착은 잘 했습니다.

근데 도착하자마자 폰이 고장나버렸어요 ㅠ_ㅠ

전화번호도 하나도 없고, 스마트폰 없으니 완전 바보됐네요..

혹시라도 트윗이나 페북통해 이 글 발견하시는 분은 멘션날리거나 댓글 다셔도 제가 못보고요;; 여기에 댓글 달아주시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집도 절도 일도 없지만 곧, 조만간 자리잡겠습니다.

지금 있는 곳은 청도시의 청양구라는 곳인데, L.A의 한인타운같은 곳으로 보시면 될듯 싶습니다.

간판에 한국말 엄청 많고요, 중국어 몰라도 미아 되지는 않을 정도인것 같아요.

어제는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더라고요.

작년에 네팔가는 바람에 눈을 못봤는데 여기와서 눈을 봤네요.

오늘은 비옵니다.

이번 주 내로 정착하는게 목표구요.

아 그냥 머리도 복잡하고 손도 막 엉키는 것이 더 이상 쓰면 안되겠네요 켁켁

그럼 다들 건강히 즐겁게 지내시고요!


보고싶어요 다들 흑흑

'Pulmaya 사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리 가슴 배  (2) 2012.05.24
거듭나기  (6) 2012.03.09
어떤 시인  (8) 2011.08.09
  (4) 2011.07.11
부끄러운 여자  (4) 2011.06.20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독자

Pulmaya 머릿속 2012. 2. 8. 23:55
사람들이 왜 시를 읽는지 잘 몰랐다

기다림은 늘 지루했다

조만간 전화드릴게요
나중에 밥 한번 먹자
그래 꼭 연락하마

도대체 언제?

공허한 약속에 무너지는 못난 내가 싫었던게지

오늘은 시를 봤다

때론 씨익 웃고 그러다 입술을 꾸욱 다물고 심각해졌다가 흐흐흐 하고 음흉하게 웃다가 흐음 하고 짧은 한숨도 쉬었다가 오호 하고 솔깃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기다리는 건 역시 지루했다

그럼 한마디 하겠지
"누가 너보고 기다리랬냐"

그래 누가 나보고 기다리라고 한 적 없지

오늘 나는 그냥 시를 읽은거지

이제야 사람들이 왜 시를 읽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아주 조금

'Pulmaya 머릿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면  (2) 2012.05.14
계란 한 판  (2) 2012.04.26
센서  (2) 2012.02.05
갈비뼈  (0) 2012.01.11
기록(1)  (0) 2011.12.16
블로그 이미지

Pulma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