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29

주말에 이어 하루 더 쉬었다고 그새를 못참고 게으름이 나무 그늘 밑 버섯처럼 빼꼼이 올라왔다.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멈췄다 하기를 두어번 반복한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오른쪽으로 누웠다 다시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반쯤 열린 창틈으로 밀려들어오는 햇볕의 질감이 흐리멍텅했다. 일찍 찾아온 여름덕분에 오월에 접어들자마자 발끝부터 살금살금 기어오는 햇볕에 아침 잠을 툭 던져낸지 좀 됐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일조량의 기세가 시들하다. 자연현상들도 요일을 타는갑다. 나도 덩달아 눈치를 보며 조금 더 게으름을 부려볼까 싶다.

두 번째 알람이 울리고 세 번째 알람이 울리기 전인지 세 번째 알람과 네 번째 알람의 사이인지 기억이 묘연하다. 눈은 계속 감은 채 다시 어깨를 돌려 오른쪽으로 돌아눕는다. 그러고 몇 초가 지났을까. 불쾌한 느낌에 미간이 확 찌푸려진다. 형체도 알 수 없는 이물감이 입안 가득 돌아다닌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텁텁하게 마른 혓바닥과 입천장 사이를 꾸물거리며 돌아다니는 미확인 물체. 이런 무례한 행위를 나는 허락한 적이 없다. 쿨럭거리는 짜증감에 잠이 확 깨서 눈을 떴지만 방 안에 인간이라고는 나밖에 없다.

‘이런 X’
출근 댓바람부터 맞닥뜨린 짜증 이상의 짜증. 1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사이에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하루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일어나지도 눕지도 않은 엉거주춤한 상태로 난감함을 수습하지 못한 채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엄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꾸욱 눌러본다.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숙취로 3일 연휴를 몽땅 날려버린 듯 했다. 더러운 기분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전쟁터에서 죽은 오라비의 부고처럼 날아든 당황스러움.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곧장 욕실로 향한다. 아직 채 데워지지 않은 물줄기를 정수리 끝으로 퍼부으며 사태 수습에 들어간다.

참으로 오랜만에 겪는 당혹스런 아침이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한 번인가 있었다.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사반세기의 골고다 언덕을 꾸역꾸역 떠밀려 올라갈 무렵이었다. 정신 줄을 놓지 않을 만큼 바쁘고 잡생각의 잔가지들이 꼼지락거리며 비집고 들어오기에는 충분했던 그런 시간들이었다. 크게 버거울 것도 낙심할 일도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을 때 잠든 나를 찾아왔던 사람이 있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모진 말들만 남겨놓고 떠났던 사람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서는 ‘너무 힘들어 하지마. 네가 힘들면 내 마음이 아프다. 잘될거야.’ 단 세 마디를 흘리고서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한참을 안아주고는 말없이 다시 돌아가버렸다.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점 하나가 되고 시야에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덤덤히 눈을 뜬 그때의 나는 그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사태 수습이 안돼서 두 무릎을 감싸 안고서는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이런 아침. 여전히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방심하면 어김없이 허를 찔리고 마는 생존의 법칙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이 비정함에 이제는 적응해야 하는 걸까 계속 나가 떨어져야 하는 걸까.



2012. 6. 3

모처럼만에 전철로 한 시간이 족히 걸리는 장거리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람이 몰리지 않는 틈과 틈 사이의 시간. 더운 바깥 날씨와는 비교되게 싸늘한 전철 좌석에 앉아 단편 소설 몇 편을 훑어본다. 땅 밑을 지나쳐 다시 바깥으로 나와 구릉구르릉 강 위의 철교를 건너고 다시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로 파고들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빠져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흥겨운 콧노래라도 할 듯이 마음이 가뿐하다.

순간 다가오는 익숙한 기운에 힐끔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건너 건너 문 앞에 한 쌍의 연인이 서 있다. 뒷골이 찌릿하며 전기가 착 들어왔다 나간다. 책갈피를 꽂아 덮고 음악의 볼륨을 줄인 다음 그 곳을 응시한다. 익숙한 남자의 옆모습과 웬 여자. 여자의 면상이 궁금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그저 투명할 뿐이다.

무릎 위에 다소곳이 있던 가방을 부여잡고 어깨에 걸치고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익숙한 남자는 옆의 여자와 확연하게 다른 명확한 형체를 가지고 있다. 내가 사 준 티셔츠, 내가 사 준 바지, 내가 사 준 신발, 등에는 내가 사 준 가방. 뭐야 이 미친놈. 너 그럼 지금 팬티도 내가 사 준 거 그거 입고 있냐. 눈에 시퍼런 칼날이 착 선다. 코로 숨 쉬고 잠시 참았다가 다시 내 쉬고 소리나지 않게 발걸음을 옮긴다.

‘오빠’
여태껏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낯선 호칭으로 남자를 부른다. 슬로우모션으로 내 쪽을 바라보는 남자. 덩달아 함께 돌아보는 투명한 여자. 둘은 말이 없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내 나름대로는 상냥하게 안부를 물었는데 남자는 말이 없다. 투명한 여자는 그저 남자의 얼굴만 쳐다본다.

‘이 분은 누구? 애인인가?’
내 목소리는 점점 차분해지고 농염해진다.

‘아는 후배야’
드디어 남자가 입을 뗐다. 투명한 여자는 안심을 하는 눈치이다. 나는 겁을 준 적이 없다. 남자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어머, 웬일이야. 애인있는 줄 몰랐네? 둘이 완전 잘 어울린다.’
누가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말을 걸지도 않았지만 계속 말을 이어간다.

‘만난 지 오래 됐나봐요?’
이번에는 투명한 여자를 향해 말을 건낸다. 남자의 안색이 좋지 않다. 그러나 별다른 제제를 가하지 않는다. 외면하고 자리를 옮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투명한 여자는 말이 없이 침을 꼴깍 삼키더니 나와 남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나는 투명한 여자 쪽으로 한걸음 다가가서 입을 살짝 손으로 가리며 여자의 귓불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다. 그리고 나서는 목소리를 더 낮게 깔고 콧소리를 섞어 말을 이어간다.

‘이 남자 나랑 잤어요. 한 두어번? 근데 나한테 애인있다는 말은 안했는데. 나는 몰랐지. 그러고 나서는 나중에 보자더니 연락 없더라구. 나쁜 놈 아닌가? 아가씨도 웬만하면 이런 놈 만나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요. 다른 사람한테 나쁜 남자가 나한테만 좋은 남자일거라는 생각 되게 순진한 거 아닌가?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자식 당신한테도 나쁜 남자잖아.’
있지도 않은 허무맹랑한 새빨간 거짓말을 마치고 침을 꿀꺽 삼키고 나니 혓바닥 끝이 착 두갈래로 갈라진다. 갈라진 혀 끝은 순식간에 한 뼘도 더 넘게 길어지더니 샤샤샤샥 소리를 내며 투명한 여자의 양쪽 귓바퀴를 감싸버렸다. 전철 문 유리에 비친 내 두 눈에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투명한 여자의 양쪽 귓바퀴를 감싸고 있던 두 갈래의 혀는 이내 새끼손가락 하나도 오가지 못할 정도로 조그만 여자의 귓구멍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혀 끝을 착 당기자 여자의 온몸을 파고들었던 혀가 발끈 힘을 주며 여자를 파괴시킨다. 투명한 그녀는 무음의 괴성을 지르며 잔해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내가 여자에게 한걸음 다가갔던 그 순간부터 남자는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남자의 얼굴은 빛을 통과시키고 남자 뒤의 전철 유리문까지 그대로 드러나 나는 남자 너머로 나의 표정을 읽는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무표정. 다시 숨을 쌔액 들이마시고 남자에게 말을 건넨다.

‘그냥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너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고. 나는 그러면 알겠다고 했을 거야.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거야. 화내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을 거라구. 근데 이게 뭐야? 문자라도 한통 보내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니? 찝찝하게...’
나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입술을 지긋이 다물고 흐음 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날 너무 원망하지는 마. 넌 나한테 그러고 나서 마음이 편했니? 두 다리 쭉 뻗고 잘 잤어? 나쁜 짓 했으면 벌 받아야지. 이제 그만 털어내자.’
짧게 말을 마치고 어느 새 불끈 쥐었던 두 손에 힘을 쫙 빼며 펴보니 왼손에 노란색 플라스틱 손잡이의 끝이 무딘 송곳이 하나 들려있다. 다시 힘을 줘 송곳을 움켜쥐고 적당히 나온 남자의 배 사이로 꾸욱 쑤셔 넣는다. 이제 남자는 어깨를 지나 명치끝까지 투명해졌다. 투명함은 빠른 속도로 아래로 기어 내려온다. 무딘 송곳 끝은 그대로 밀려들어 갔지만 두툼한 남자의 뱃살 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재빨리 송곳을 거두어 들이고 다시 손에 힘을 탁 풀었더니 이번에는 오른손에 날이 새파랗게 선 수술용 메스가 들려있다. 거의 배꼽까지 투명해진 남자의 뱃가죽 위로 메스가 샥 지나간다. 찢어진 티셔츠와 벌어진 살 사이로 에일리언의 타액같은 푸른 녹색의 끈적한 액체들이 꾸럭꾸럭 밀려나온다. 남자의 부피는 급속도로 줄어든다. 허벅지까지 투명해진 남자의 몸통을 타고 물컹물컹한 유동체가 흘러내린다. 배꼽을 기준으로 찰랑거리던 그것들이 남자의 다리에 힘이 풀어지며 스물스물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미 전철 한 량의 바닥을 가득 메우고 내 발목까지 차올랐다. 남자의 다리가 사라지고 이제 두 발 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새 신발도 투명해진 두 발의 엄지 발톱까지 녹아내리더니 남자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지긋이 눈을 감고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진행한다. 눈을 떠보니 그 끈적거리던 물체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내 두 발도 뽀송뽀송 말라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아까 앉았던 좌석으로 돌아와 앉아 보다 만 단편집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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