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

Pulmaya 머릿속 2012. 8. 26. 17:09

참 무모하게 더웠던 여름이었다. 더위때문에 세상을 하직하고 만 가여운 생명이 하나 둘 늘어갔다. 해가 갈수록 괴물처럼 더워질 여름이라 생각하니 전쟁에 임하는 사람처럼 단단히 각오하지 않으면 나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맛 본 첫 해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여름 더위와의 한 판 승부에서 KO패를 눈 앞에 두고서도 번번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한 인간에 대한 증오심때문이었는데, 그 인간을 생각하면 정수리에서 꼬리뼈까지 타고 내려가는 섬뜩함때문에 이번 여름은 더위에 정신이 혼미해 질 때마다 그 섬뜩함을 상기시키며 제정신을 차리곤 했다.

어중간한 삼십년 인생에서 더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도 없지는 않았을텐데 감각이란 미묘한 것으로 시차와 거리감이 있어 항상 지나간 일 보다는 근래에 발생한 일들에 대해 더욱 또렷이 기억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당분간 한 인간을 향한 증오심은 계속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이번 경우가 좀 어렵고 지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개별 사건에서 오는 상황이나 상태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인간과 같은 공간에 존재했던 내가 그 인간과 개별적 존재로 느꼈던 -나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는- 그 인간의 가식, 그리고 그 가식에 대한 원인불명의 증오심, 그 증오심에서 비롯된 앙심. 이런 나쁜 것들로 이루어진 감정은 정화되기도 희석되기도 쉽지 않다.

지금은 폭로할 때가 아니다. 어쩌면 나의 감정이 과도하게 증폭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증폭되어 있다고 해서 허구는 아니기 때문에 이 거품이 사그라들고 알짜배기만 남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그 대상은 별 볼일 없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그런 비효율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빈대가 뚱뚱해지기를 기다리거나, 빈대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흡혈귀였다 뭐 이런 반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래나 저래나 기다려야 한다. 십년에서 십오년 후를 상상해 본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빈대의 배를 짝- 터트리는 희열감을 맛보게 될 수도 있고, 흡혈귀로 변신한 빈대에게 강렬한 햇빛레이져를 발사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도도한 최후를 목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실은 빈대는 여전히 빈대로 남아 있을테니 십년에서 십오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 내 자신이 빈대를 미워하고 증오했던 사실조차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그 얄팍한 감정을 휙-하고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게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스스로 내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못견뎌 하는 것은 인간의 '가식' 인데, 동물이 아닌 인간은 누구나 가식적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 스스로는 그렇지 않느냐? 끊임없이 자문하고 자답해야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이중잣대로는 마음 편하게 살기 어려운 세상 아닌가. 스스로가 이중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특정 인간의 가식을 증오하는 중이다. 첫 번째 해결책으로 그 인간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관계를 끊는 것 만으로 증오심이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감정을 잘 다스리고자 노력 중이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인데, 더 이상 네가 마음 상하고 상처받을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킨 후, 설사 유감스럽게도 또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해도 너의 가치와 존재 자체가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너는 외부의 자극과 무관하게 독립되어 있다고 내 스스로를 다독인다.

어쨌든 시간이 필요한데, 단순히 시간만 필요한 것은 아니며 그 시간을 잘 채울 여러가지 요소들이 필요하다. 공허한 시간은 감정을 증폭시키기 마련이므로 이제부터는 공허함을 깨고 그 틈을 채우는 요식행위가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은 노동을 하고 밥을 먹고 먹은 것을 배설하기도 하며 취미생활을 하기도 하고 잠도 잔다. 이 모든 것이 시간을 채우기 위한 행위이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어떻게 잘 채울 것인지 조곤조곤 계획을 세워 볼 작정이다.

내년 여름은 더 더울지 모르는데 피서를 위해 증오심을 붙잡고 있는 어이없는 짓은 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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