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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29

주말에 이어 하루 더 쉬었다고 그새를 못참고 게으름이 나무 그늘 밑 버섯처럼 빼꼼이 올라왔다.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멈췄다 하기를 두어번 반복한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오른쪽으로 누웠다 다시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반쯤 열린 창틈으로 밀려들어오는 햇볕의 질감이 흐리멍텅했다. 일찍 찾아온 여름덕분에 오월에 접어들자마자 발끝부터 살금살금 기어오는 햇볕에 아침 잠을 툭 던져낸지 좀 됐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일조량의 기세가 시들하다. 자연현상들도 요일을 타는갑다. 나도 덩달아 눈치를 보며 조금 더 게으름을 부려볼까 싶다.

두 번째 알람이 울리고 세 번째 알람이 울리기 전인지 세 번째 알람과 네 번째 알람의 사이인지 기억이 묘연하다. 눈은 계속 감은 채 다시 어깨를 돌려 오른쪽으로 돌아눕는다. 그러고 몇 초가 지났을까. 불쾌한 느낌에 미간이 확 찌푸려진다. 형체도 알 수 없는 이물감이 입안 가득 돌아다닌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텁텁하게 마른 혓바닥과 입천장 사이를 꾸물거리며 돌아다니는 미확인 물체. 이런 무례한 행위를 나는 허락한 적이 없다. 쿨럭거리는 짜증감에 잠이 확 깨서 눈을 떴지만 방 안에 인간이라고는 나밖에 없다.

‘이런 X’
출근 댓바람부터 맞닥뜨린 짜증 이상의 짜증. 1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사이에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하루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일어나지도 눕지도 않은 엉거주춤한 상태로 난감함을 수습하지 못한 채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엄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꾸욱 눌러본다.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숙취로 3일 연휴를 몽땅 날려버린 듯 했다. 더러운 기분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전쟁터에서 죽은 오라비의 부고처럼 날아든 당황스러움.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곧장 욕실로 향한다. 아직 채 데워지지 않은 물줄기를 정수리 끝으로 퍼부으며 사태 수습에 들어간다.

참으로 오랜만에 겪는 당혹스런 아침이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한 번인가 있었다.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사반세기의 골고다 언덕을 꾸역꾸역 떠밀려 올라갈 무렵이었다. 정신 줄을 놓지 않을 만큼 바쁘고 잡생각의 잔가지들이 꼼지락거리며 비집고 들어오기에는 충분했던 그런 시간들이었다. 크게 버거울 것도 낙심할 일도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을 때 잠든 나를 찾아왔던 사람이 있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모진 말들만 남겨놓고 떠났던 사람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서는 ‘너무 힘들어 하지마. 네가 힘들면 내 마음이 아프다. 잘될거야.’ 단 세 마디를 흘리고서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한참을 안아주고는 말없이 다시 돌아가버렸다.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점 하나가 되고 시야에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덤덤히 눈을 뜬 그때의 나는 그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사태 수습이 안돼서 두 무릎을 감싸 안고서는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이런 아침. 여전히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방심하면 어김없이 허를 찔리고 마는 생존의 법칙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이 비정함에 이제는 적응해야 하는 걸까 계속 나가 떨어져야 하는 걸까.



2012. 6. 3

모처럼만에 전철로 한 시간이 족히 걸리는 장거리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람이 몰리지 않는 틈과 틈 사이의 시간. 더운 바깥 날씨와는 비교되게 싸늘한 전철 좌석에 앉아 단편 소설 몇 편을 훑어본다. 땅 밑을 지나쳐 다시 바깥으로 나와 구릉구르릉 강 위의 철교를 건너고 다시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로 파고들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빠져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흥겨운 콧노래라도 할 듯이 마음이 가뿐하다.

순간 다가오는 익숙한 기운에 힐끔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건너 건너 문 앞에 한 쌍의 연인이 서 있다. 뒷골이 찌릿하며 전기가 착 들어왔다 나간다. 책갈피를 꽂아 덮고 음악의 볼륨을 줄인 다음 그 곳을 응시한다. 익숙한 남자의 옆모습과 웬 여자. 여자의 면상이 궁금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그저 투명할 뿐이다.

무릎 위에 다소곳이 있던 가방을 부여잡고 어깨에 걸치고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익숙한 남자는 옆의 여자와 확연하게 다른 명확한 형체를 가지고 있다. 내가 사 준 티셔츠, 내가 사 준 바지, 내가 사 준 신발, 등에는 내가 사 준 가방. 뭐야 이 미친놈. 너 그럼 지금 팬티도 내가 사 준 거 그거 입고 있냐. 눈에 시퍼런 칼날이 착 선다. 코로 숨 쉬고 잠시 참았다가 다시 내 쉬고 소리나지 않게 발걸음을 옮긴다.

‘오빠’
여태껏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낯선 호칭으로 남자를 부른다. 슬로우모션으로 내 쪽을 바라보는 남자. 덩달아 함께 돌아보는 투명한 여자. 둘은 말이 없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내 나름대로는 상냥하게 안부를 물었는데 남자는 말이 없다. 투명한 여자는 그저 남자의 얼굴만 쳐다본다.

‘이 분은 누구? 애인인가?’
내 목소리는 점점 차분해지고 농염해진다.

‘아는 후배야’
드디어 남자가 입을 뗐다. 투명한 여자는 안심을 하는 눈치이다. 나는 겁을 준 적이 없다. 남자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어머, 웬일이야. 애인있는 줄 몰랐네? 둘이 완전 잘 어울린다.’
누가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말을 걸지도 않았지만 계속 말을 이어간다.

‘만난 지 오래 됐나봐요?’
이번에는 투명한 여자를 향해 말을 건낸다. 남자의 안색이 좋지 않다. 그러나 별다른 제제를 가하지 않는다. 외면하고 자리를 옮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투명한 여자는 말이 없이 침을 꼴깍 삼키더니 나와 남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나는 투명한 여자 쪽으로 한걸음 다가가서 입을 살짝 손으로 가리며 여자의 귓불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다. 그리고 나서는 목소리를 더 낮게 깔고 콧소리를 섞어 말을 이어간다.

‘이 남자 나랑 잤어요. 한 두어번? 근데 나한테 애인있다는 말은 안했는데. 나는 몰랐지. 그러고 나서는 나중에 보자더니 연락 없더라구. 나쁜 놈 아닌가? 아가씨도 웬만하면 이런 놈 만나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요. 다른 사람한테 나쁜 남자가 나한테만 좋은 남자일거라는 생각 되게 순진한 거 아닌가?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자식 당신한테도 나쁜 남자잖아.’
있지도 않은 허무맹랑한 새빨간 거짓말을 마치고 침을 꿀꺽 삼키고 나니 혓바닥 끝이 착 두갈래로 갈라진다. 갈라진 혀 끝은 순식간에 한 뼘도 더 넘게 길어지더니 샤샤샤샥 소리를 내며 투명한 여자의 양쪽 귓바퀴를 감싸버렸다. 전철 문 유리에 비친 내 두 눈에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투명한 여자의 양쪽 귓바퀴를 감싸고 있던 두 갈래의 혀는 이내 새끼손가락 하나도 오가지 못할 정도로 조그만 여자의 귓구멍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혀 끝을 착 당기자 여자의 온몸을 파고들었던 혀가 발끈 힘을 주며 여자를 파괴시킨다. 투명한 그녀는 무음의 괴성을 지르며 잔해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내가 여자에게 한걸음 다가갔던 그 순간부터 남자는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남자의 얼굴은 빛을 통과시키고 남자 뒤의 전철 유리문까지 그대로 드러나 나는 남자 너머로 나의 표정을 읽는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무표정. 다시 숨을 쌔액 들이마시고 남자에게 말을 건넨다.

‘그냥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너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고. 나는 그러면 알겠다고 했을 거야.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거야. 화내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을 거라구. 근데 이게 뭐야? 문자라도 한통 보내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니? 찝찝하게...’
나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입술을 지긋이 다물고 흐음 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날 너무 원망하지는 마. 넌 나한테 그러고 나서 마음이 편했니? 두 다리 쭉 뻗고 잘 잤어? 나쁜 짓 했으면 벌 받아야지. 이제 그만 털어내자.’
짧게 말을 마치고 어느 새 불끈 쥐었던 두 손에 힘을 쫙 빼며 펴보니 왼손에 노란색 플라스틱 손잡이의 끝이 무딘 송곳이 하나 들려있다. 다시 힘을 줘 송곳을 움켜쥐고 적당히 나온 남자의 배 사이로 꾸욱 쑤셔 넣는다. 이제 남자는 어깨를 지나 명치끝까지 투명해졌다. 투명함은 빠른 속도로 아래로 기어 내려온다. 무딘 송곳 끝은 그대로 밀려들어 갔지만 두툼한 남자의 뱃살 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재빨리 송곳을 거두어 들이고 다시 손에 힘을 탁 풀었더니 이번에는 오른손에 날이 새파랗게 선 수술용 메스가 들려있다. 거의 배꼽까지 투명해진 남자의 뱃가죽 위로 메스가 샥 지나간다. 찢어진 티셔츠와 벌어진 살 사이로 에일리언의 타액같은 푸른 녹색의 끈적한 액체들이 꾸럭꾸럭 밀려나온다. 남자의 부피는 급속도로 줄어든다. 허벅지까지 투명해진 남자의 몸통을 타고 물컹물컹한 유동체가 흘러내린다. 배꼽을 기준으로 찰랑거리던 그것들이 남자의 다리에 힘이 풀어지며 스물스물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미 전철 한 량의 바닥을 가득 메우고 내 발목까지 차올랐다. 남자의 다리가 사라지고 이제 두 발 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새 신발도 투명해진 두 발의 엄지 발톱까지 녹아내리더니 남자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지긋이 눈을 감고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진행한다. 눈을 떠보니 그 끈적거리던 물체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내 두 발도 뽀송뽀송 말라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아까 앉았던 좌석으로 돌아와 앉아 보다 만 단편집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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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23

 

'거 참, 공식이 딱 맞아 떨어진단 말이야.'

'네? 무슨 말씀이신지?..'

'과거를 기억해 낼때는 눈동자가 왼쪽으로, 없었던 일을 상상할때는 오른쪽으로. 방금 네 눈이 그렇게 움직이네. 왼쪽으로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별 것 아닌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잠시 생각좀 했을 뿐인데 뭔가 몹쓸 것을 들켜버린듯이 부끄러워졌다. 딱히 숨기고 감춘 것은 없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내 앞의 그가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이 오묘했다.

 

신발을 벗고 마주앉은 밥상의 오른쪽으로 상이 둘이나 더 있었지만 때를 넘긴 저녁시간에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의 한적한 일식집이라 더 이상 들어오는 손님은 없다. 이따금 바깥 홀의 소음이 살짝 방해가 되기도 했지만 시선을 가려주는 미닫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은 분리되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으나 마치 식당 하나를 전세내어 둘만의 식사를 하는 것 같은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다. 고급 일식집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일식집인데 밥상 위에 날생선은 한 조각도 없다. 먹어줄만한 탕요리 하나, 잘못 먹었다간 입천장이 다 벗겨질법한 바싹 구워진 생선구이 하나. 그나마도 오고가는 대화때문에 밥그릇은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상태였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오고간다. 남자의 중저음이 낮게 깔리고 나면 여지없이 거의 같은 길이의 분량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다시 남자의 중저음이 리드를 한다. 말이 끊기기가 무섭게 여자의 목소리가 빠른 템포로 따라붙는다. 잠시 틈을 두고 남자의 중저음이 짧게 되받아친다. 이번에는 조금 더 틈을 두고 여자의 목소리가 더 짧게 맞받아친다. 여자의 목소리는 꼬박꼬박 대답을 한다. 혼자서 경쟁하듯 말꼬리를 놓치는 법이 없다. 남자의 중저음은 급할 것이 없다. 계속해서 말소리가 오고간다.

 

'어떤 여자가 결혼을 하고 애를 셋이나 낳았지. 그런데 하루는 기분이 좋지 않다고 방에 쳐박혀서 울고 있었어. 남편이 와서 얘기했지. 여보, 이제 그만 울고 나가요. 오늘 우리 셋째 생일이잖소. 여자가 대답을 했지. 그쵸. 내가 잘못하고 있는거죠. 내가 나쁜 년인거죠.'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면 안되요?'

남자는 대답이 없다. 여자는 이런 선문답같은 대화는 익숙치않을뿐더러 불편하다. 이 두사람 밥상머리에서 밥은 안먹고 뭐하고 있는건가. 심기가 불편하니 속이 메스꺼워진다.

 

결국 밥그릇은 둘 다 비우지 못했다. 반찬접시도 남겨진 채 그대로다. 뚝배기 안에 뱅 둘러 찬 벌거죽죽한 탕의 가장자리는 바짝 말랐다. 생선구이는 애초부터 구리구리한 갈색이었고 촉촉함을 잃은지 오래다.

 

미닫이 문이 드륵 열리고 분리되었던 이쪽과 저쪽이 다시 만났다. 무엇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합이 만오천원. 유리문 모서리에 달린 말라비틀어진 생선구이 색깔의 작은 종이 땡그랑 울린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건조한 찬 공기가 여자의 콧구멍으로 스륵 하고 빨려들어가더니 순간 명치끝이 저릿한다. 여자는 불편함에 왼쪽 윗배를 움켜잡는다. 뭔지 모를 억울한 덩어리들이 울컥 올라온다.

'왜그래? 어디가 불편하니?'

'그냥 좀 속이 안좋아서요.'

앞서 가던 남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질문한다. 그러고 나서는 배를 움켜쥐지 않은 여자의 왼손을 당겼다 놓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다. 정 못견디겠으면 그냥 게워내라.'

'네. 그래볼게요.'

남자의 중저음은 변함이 없다.

 

곧 여자는 남자의 지시대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좌변기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는다. 먹은 것이 없으니 딱히 나올 것도 없는데 게워내라 하였으니 그렇게 한다. 공연히 쿠르르릉 아까운 수돗물만 하수도를 향한다. 

 

 

 

2011. 7. 28 

 

영화 Mr. Nobody

아주 우연이었다. 지구상의 마지막으로 죽는 인간. 주인공에게는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노란 금발의 생머리의 여인이 울고 있다. 셋째 아이의 생일이다. 주인공은 우리 막내의 생일이라며 그 여인을 달랜다. 울먹거리던 여인은 그럼 나 지금 나쁜 엄마인거지 하며 거실로 뛰쳐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미친듯이 깔깔거리고 떠들며 즐거운 생일파티를 한다.

 

여자는 이제서야 암호를 풀었다. 암호를 푼 것과 동시에 주문에 걸렸다. 아직 있지도 않은 셋째 아이 생일에 울고 자빠져 있는 그 여인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때 남자는 왜 그 이야기를 한 것인지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나는 주문을 풀기 위해 지난 삼십년동안 축적된 지식을 총동원해보았지만 풀어낼 수가 없다. 도대체 셋째아이 생일날 울고 자빠져 있는 나쁜 엄마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해답에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2011. 8. 15

 

셋째 아이 생일에 울고 나자빠져 있는 나쁜 엄마가 되는 주문을 푸는 법을 찾았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그 남자의 아이를 셋이나 낳을 필요도 없고, 그러면 그 남자와의 셋째 아이의 생일에 울고 있을 필요도 없는 거였다. 답은 찾았지만 개운하거나 유쾌하지 않다. 주문을 풀기 위해서는 다른 남자가 필요해 진 것이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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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9

주말 오후에 차를 끌고 나오는게 아니었다. 몇 년 만에 엠티 따라간답시고 오지랖을 부리는 바람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 맞는 서른번째 생일을 앞두고 스스로 준비한 생일선물 여행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출발 한시간 전까지 망설이긴 했지만 이미 계획된 일이었고 사전에 연락을 취해둔 사람들도 있으니 그대로 진행할 수 밖에 없다. 운전에 익숙해졌다고 아무리 합리화 해봐도 내 덩치에 suv는 좀 무리스럽긴 하다. 이런 몽롱한 정신으로 운전대를 잡는 건 사실 범죄에 가까웠다. 그래도 대한민국이 발급해 준 면허도 있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니 객관적으로는 아무 문제될 것 없는 상황이었다.

 

해지기 직전에 출발했지만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금세 어둑어둑해져버렸다. 평균 시속 35km의 속도는 좀 많이 어중간했다. 이건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것만 못하다. 아 졸려.... 까딱 잘못해서 정신줄 놨다가는 큰맘 먹고 출발한 여행이고 뭐고 렌트한 차에 스크래치내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게 생겼다. 대책없는 인생이다.

 

아직 휴게소 들어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졸리다 못해 졸도해버릴 것 같다. 앞서가는 차의 후미등과 브레이크등이 정신을 교란시킨다. 살짝 토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정말 답이 안나온다.

 

노래라도 들으면 좀 나을까 싶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각성에 꽤 효과가 있는 곡으로 치자면 심성락 연주곡만한 것들이 없다. 아코디언의 음색이 졸지마라고 경고를 해준다. 고마울 따름이다. 하필 이럴때 혼자 여행이라니. 조수석에 누구 하나라도 앉아 있었더라면 얘기라도 두런두런 해가면서 어떻게든 겨우겨우 갈 수 있을듯 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지금은 누구라도 사람의 목소리와 단 몇마디라도 나눠야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겠다. 생존은 중요하다. 전화번호 몇 개를 꾹꾹 눌러보지만 토요일 저녁에는 다들 바쁠수 밖에 없다. 어 나야. 나 운전 중인데 너무 졸려서 그냥 걸어봤다. 야, 안돼!!! 빨리 휴게소 들어가!!! 사고나면 어떡할라고!!! 대본을 읽어내리듯 판에 박힌 대화가 몇차례 오고간다. 사고나면 어떡할라고. 그래 나도 알지. 근데 휴게소가 넘 멀다구. 휴게소 들어갔으면 내가 전화했겠냐. 한숨밖에 안나온다.

 

그때 어쩌자고 너에게까지 전화를 한 것인가.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잘지내니?'

운전 중인데 휴게소는 너무 멀고 너무 졸리다고 하지 않았다.

 

'회사는 왜 그만 뒀어요?'

'뭐? 니가 그걸 어떻게 알어? 내가 얘기했었나???'

앞뒤 잘라먹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바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지난 번에 얘기했잖아요. 회사그만뒀다고.'

'그러니까 그걸 언제 얘기했냐고. 아 뭐지? 뭐 살다보면 사람이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는거야.'

좀더 세련된 말들이 필요했지만 이미 혼미해진 정신에 그럴 경황이 없다. 그냥 좀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기분전환도 필요하다고. 그런 연후에야 사람이 살다보면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는거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는 그냥 안부가 궁금해서 걸어봤다고 잘지내라고 하고 끊었어야 했다.

 

'내가 좀 정리가 안되긴 하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어. 무슨 말인지 이해안되도 되묻지 말고 알아서 들어. 내가 좀 그러니까. 이게 이상하긴 한데, 니가 보고싶은 거 같아. 근데 그게 진짜 보고싶은건지 아니면 그냥 잠깐 그런건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계속 생각해볼꺼야. 그러니까 앞으로 한 달, 아니 반년정도 지나도 계속 보고싶으면, 그러니까 잠깐 그런게 아니면 한 번 좀 봐도 될까? 아 뭐 당연히 니가 괜찮으면 보는거지.'

 

툭 뱉어놓고도 너무 해괴망측해서 어디 숨어버리고 싶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그것도 운전 중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저... 교환학생가요. 다음 학기에'

대화에 ABCD가 없다. 징검다리 건너듯 띄엄띄엄 이게 무슨 짓인가.

 

'뭐? 교환학생? 어디로?'

'페루요.'

'뭐? 페루? 거기 남미아냐?'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우리나라보다 한참 못사는 나라래요.'

'야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돼. 세상 어딜가도 다 배울게 있는거야. 더군다나 너 지금 교환학생 가는거라며. 그럼 배우러 가는거잖아.'

'네 뭐 그렇긴해요.'

'그래. 그럼 영어만 하지 말고 그 나라 말도 좀 배우고 잘 지내다 오면 되지. 근데 얼마나 있다 오는데?'

'2년 뒤에 와요.'

'뭐? 2년이나? 언제가는데?'

'7월이나 8월쯤에 갈거예요.'

 

2년. 당황스러운 기간이다. 한학기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2년이라니.

안그래도 머리 속이 뒤죽박죽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불현듯 성냥불이 탁 켜지듯 생각나는 것이 있다.

 

'참, 너 여자친구가 뭐래? 그렇게 2년씩이나 그렇게 멀리 간다는데 뭐라고 안해?'

그게 왜 궁금한데? 미친 게 분명하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라구.

 

'여자친구랑 같이 가요. 양가 허락 받았어요.'

 

양가 허락 받았어요.

양가 허락 받았어요.

 

난 무슨 짓을 한걸까.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거야. 이제 그만 멈춰야 된다. 나도 그걸 안다.

 

'아 그렇구나. 잘 됐네. 멀리 혼자 가 있는 것보다 둘이 가면 외롭지는 않겠다. 다행이네.'

'네. 그렇겠죠.'

미친년. 별 지랄을 다 한다. 이 무슨 낯뜨거운 오지랖이냐.

 

'누나'

'어, 말해. 하고 싶은 말 있음 해.'

'.....................'

'말 하려다가 안하고 뜸들이면 궁금하잖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되.'

'.........아니예요.'

'어. 그래. 뭐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

 

말은 오고가지만 어떻게 수습할 방법은 없고 어색함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제 연락한다고 안할거지?'

'.....'

'대답해.'

'네..'

'그래. 그럼 이걸로 정리하자.'

'네..'

'잘 살아라.'

'네..'

 

 

 

그때 마지막으로 네가 나에게 하려했던 말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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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21

 

'지은아'

 

이름 석자 불러주었을 뿐이었는데 순간 세계는 재구성되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메시지를 확인하다 그 조그만 화면에 내 이름이 그렇게 턱하니 던져져있다는 것에 흠칫 놀라 누가 '아이스케키'라고 하며 치마라도 들춘 마냥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생각해도 내 뺨따구가 너무 후끈거려 민망하기 그지 없어 그 짧은 순간 동안에 걷는 속도를 늦추고 앞뒤좌우를 살폈다. 당연히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저 나 혼자만 인식한 새계의 재구성. 햇빛의 색깔이 착, 하고 반짝거렸다 멈추었고 저 앞에서 나를 향해 흘러오던 공기들이 움찔, 하면서 주춤거렸다. 발을 딛고 있던 땅도 살짝- 아주 살짝 꾸궁하고 내려 앉았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다른 층에 도착한 것 같은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아직까지 그로부터 단 한번도 지칭되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우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어색한 그와의 사이에서 우리는 굳이 서로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그냥 말을 걸면 대답을 하고 바쁘면 놓치고 지나가는 그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냥 그 정도 거리의 사람.

 

그는 확인했다.

'내가 너를 지은이라고 부른적이 있나? 실제로'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만약 그랬었다면 그 순간 세계가 재구성되는 미묘한 흔들림을 느끼지 않았겠지. 그 진동은 시작이자 처음을 알리는 거였다. '한 번도 불림당한적 없는 것 같은데요' 나는 기억을 쥐어짜낼 필요도 없이 단호한 뉘앙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저 흔한 이름이었다. 다만 최근에 특별해졌다면 누구나 다 아는, 대중의 사랑을 듬뿍받는 유명 연예인의 본명과 같아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자체 신상털기를 해보아도 내 개인에 대해서는 찾아낼 수 없는 그 흔해빠진 이름 석 자. 뭐 별 볼 것도 없는 그 이름 석 자가 어느 순간 특별한 개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은아'

여물먹는 동물처럼 다시 끄집어내어 반추해보았지만 아까와 같은 울림은 없다. 내 스스로 내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지은아'

또 한 번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내 이름을 되새김질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고로 이름이란 것은 누가 불러주었을 때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름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어색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 뜬금없어서 확인하기로 했다.

그는 갑자기 그냥 생각이 났다고 했다. 자신이 나를 불러보거나 먼저 말을 걸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고 했다. 그러나 생각이 났다는 건 좀 말이 안됐다. 생각이란 것은 있었던 일이나 상황에 대한 기억인 것인데, 예컨데 내가 매번 먼저 너에게 말을 걸곤 했다. 라고 생각하거나 기억해낼수는 있어도, 나는 너에게 먼저 말을 걸어본 적이 없다. 라고 기억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지금 발생하지도 않았던 일에 대해 생각이 났다고 표현하고 있는 거다.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때가 되어 잠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점심을 먹었는지, 오늘 누군가와 약속이 있는지를 궁금해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질의 것이다. 기억의 구성. 수동적이지만 나의 세계의 재구성은 그의 기억의 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의 새로운 세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다.

 

 

2012. 2. 22

고등학교까지의 정규 교육을 무난히 마쳐 놓고 이제서야 생각이 났다.

 

바로 문제의 발단이자 원인이자 해설서인 김춘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어떤 법칙이 절대적이려면 그의 역도 성립해야 하는 법이다. 이 독한 시는 피아를 바꾸어도 성립이 되고만다. 이름이란 그런 것이다. 없는 꽃도 만들어 내는 것이 이름인게다.

 

세계가 재구성 된 그 순간, 나는 그 세계의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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