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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정신

막 지어낸 이야기 2012. 12. 21. 01:17
2012년 12월 20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제 정신인 사람은
본인의 역사의식에 가만히 손 얹고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살면서 몰라서 악마가 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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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m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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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니

시커멓게 타들어간 숯덩어리 죄다 꺼내어 묻고 가자

 

눈 속에 묻고 가면 눈 녹을 때 즈음에는 스르르 녹아 없어지겠지

 

행여나 말 한마디 더 보태고 싶은 이 있다면 그것도 묻고 가시게

 

진상 부릴때는 모른 척 해주는 것도 매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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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m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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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떨어진 아침 공기와 팔짱끼고

종종걸음으로 출근하여

시린 손 부벼가며 데워먹는 호박죽 한 그릇은

내게 너무 과분한 것

 

어두컴컴한 책상 밑에서

빠알간 눈 지긋이 내리깔고

내 두 다리를 지켜보는 작달만한 온열기도

내게 너무 과분한 것

 

퇴근길 양 가로에 빽빽히 줄 서서

노란 컷트머리 흔드는 은행나무 발치에

툭 툭 떨어져 으개지고 짓뭉개져 구리구리한 은행도

내게 너무 과분한 것

 

누군가의 심혈로 쓰였을 짤막한 시 한 줄을

지하철 광고판 보듯 흘겨보는 일도 내겐 너무 과분하고

한 사람이 필기감이 다른 펜을 바꿔가며 쓴 듯한

젊은 작가들의 밋밋한 단편소설을 읽는 것도 내겐 너무 과분하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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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2)

막 지어낸 이야기 2012. 10. 24. 14:42

그렇게 아가씨는 한참을 쭈뼛쭈뼛 침을 꿀꺽 삼키다가 입술을 뗄까 말까 망설이더니 그냥 스스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맙니다.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미안한듯 민망한듯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무슨 일이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요."

선생님은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익숙하다는 듯이 가볍게 말을 건넵니다.

 

띠리링 현관문에 달린 종소리를 뒤로 하고 아가씨의 모습이 희미해집니다.

언제 다시 아가씨를 볼 수 있는 걸까요. 다시 볼 수 있긴 한걸까요.

 

 

-----------------------------------------------------------------------------------------------------------------------------------------

그저께는 비가 내렸습니다. 그 바람에 어제는 코끝이 찡하도록 싸늘한 날씨에 우리 모두의 어깨가 움츠러 들어버렸어요. 하루를 그렇게 보낸 덕분인지 오늘은 옷차림도 표정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가는 아이들과 출근 인파가 빠져나간 언덕 위의 골목은 이제서야 한산해졌습니다. 이제 곧 짧아진 해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종종 발걸음을 만날 수 있겠지요.

 

점심 시간이 지나자 언덕 위의 작은 의원 유리 현관문에 조그맣게 팻말이 나붙었네요. 오늘은 환자가 많이 없나봅니다.

 

"기억을 잘라 드립니다."

 

오늘은 또 어떤 환자가 찾아올지, 찾아오는 환자가 있긴 할런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가 되었습니다. 영 차갑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따사롭지도 않은 햇볕을 따라 한 아가씨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언덕을 올라오고 있습니다. 지난 봄 긴 생머리를 드리웠던 바로 그 아가씨였습니다!

 

계절이 두번 바뀐 이제서야 다시 나타난 아가씨는 시간의 흐름만큼 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길게 드리웠던 탐스러운 머리칼을 어깨선 위로 잘라내고 가볍고 발랄한 세팅펌으로 양 옆에 볼륨을 주었는데 귀여운 머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표정은 어두운 편이었어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옅은 그늘이 있었어요.

 

아가씨가 천천히 작은 의원 유리문 앞에 멈춰 섭니다.

손목과 손가락에 힘을 주어 지긋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갑니다.

 

'띠링'

유리문이 열리자 바깥공기와는 사뭇 다른 촉촉한 온기가 아가씨의 코끝을 톡 건드립니다.

안단테정도 빠르기의 바이올린 연주곡이 어깨를 감싸줍니다.

 

잠시 무언가를 적는 일에 몰두하고 있던 간호사 선생님이 고개를 들어 아가씨를 보고 인사를 건넵니다.

"어서오세요, 저희 병원 처음이신가요?'

"아니요. 한 반 년 전에 한 번 왔었는데요.."

"그럼 진료카드 확인해볼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평범한 의원에서 오고가는 대화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몇마디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우연인지 공교롭게도 대기실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아가씨는 진료실로 들어갑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몇 달 전과 변함없이 차분하고 단아한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시간을 무색하게 하네요.

 

"저번에 오셨다가 그냥 가셨죠? 이번에는 어떻게 다시 오게 되었어요?"

초승달 같은 선생님의 웃는 눈에 걸맞는 따뜻한 목소리에 아가씨는 살짝 미소지으며 목에 둘렀던 머플러를 풀어내며 입을 엽니다.

 

"선생님이라면 절 도와주실거라는 믿음이 생겨서 다시 왔어요."

아까까지 옅은 그늘이 졌던 아가씨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밝아지더니 두 눈동자에서 빛이 반짝 납니다.

 

"그래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볼게요.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기억을 잘라주신다고 하셨죠? 그럼 잘려나간 기억들을 다시 이어 붙이는 것도 가능할까요?"

 

이번에는 선생님의 얼굴에 전에 없던 홍조가 돌며 두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가며 표정이 또렷해집니다.

그러고는 선생님이 대답을 이어갑니다.

"음. 서로가 서로를 믿고 노력하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 천천히 환자분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까요? 무슨 이야기든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단호하지만 재촉하지 않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아가씨는 큰 힘을 얻습니다.

 

이제 아가씨는 이야기를 풀어낼 준비가 된 걸까요? 궁금해서 심장이 콩닥거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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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m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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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살짝 우중충한 주말 아침에도

빈둥빈둥거려도 기분은 보송보송해지는그런 글 한 줄 남겨야겠다.

불안불안하고 어둡고 슬프고 축축하고 아슬아슬한 그런 글말고

담담하고 어둠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되고 슬픔을 어루만지고 장마철에도 잘 마른 수건처럼 흡족하며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도 평온한 그런 글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엌에서 김치볶음밥을 하다가 '오늘은 좀 깜깜하네'하며 형광등을 탁-켜니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환한 빛이 살금살금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뭐 이런 글

우울을 팔아먹지 않아도

슬픔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아도

과거를 울궈먹지 않아도

과도하게 분노하고 절규하지 않아도

충분히 글로서 자격이 있지 않은가.

묵묵하고 꿋꿋하고 우직한 글 한 단락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김치볶음밥 다 되었다. 아침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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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기억해달라.

 

황량한 들판에 바람따라 누웠다 꺾여버려 일어나지 못한 풀도 좀 기억해주고

 

아스팔트 갈라진 틈을 비집고 오롯이 꽃으로 피어나지 못 한 채 씨앗으로 생명을 마감한 들꽃도 좀 기억해주고

 

태풍 거센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버려 환경미화원 분들에게 민폐끼친 플라타너스 낙엽도 기억해주고

 

뙤약볕에 말라 비틀어진 저기 어디 논두렁에 웃자란 콩이파리도 좀 기억해달라.

 

 

가뜩이나 별 볼일 없는 것도 서러운데

 

약해도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것들에게만 주목하여 적자생존이 진리라고 쳐도

 

살아남은 것보다 고꾸라진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좀 기억해달라.

 

 

 

왜 나자빠졌냐고 다그치지만 말고

 

그것밖에 안되냐고 차갑게 쏘아보지만 말고

 

더 잘해야 한다고 채찍질하지도 말고

 

웃는 얼굴로 힘내라고 등 떠밀지도 말고

 

그냥 그런 볼품없고 허망한 것도 있다고 인정해주라.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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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고,

그저 내 마음 알아주기만 바라고,

못된 버릇 고칠 생각은 추호도 없고,

아글타글 아등바등 노력하고 싶지도 않고,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설치지도 못하겠고,

일인자가 될 욕심과 포부 또한 전혀 없으며,

그냥 이대로 딱 지금 수준에 만족해서 더 잘 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니,

죽을때까지 아마추어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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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철철 오는 것은 다 너를 흘려 보내라는 뜻. 강은 너무 머니까 이렇게라도 말끔히 씻어 보내라고. 水葬시켜버리라고. 물에 퉁퉁 불어 떠오르지 마라고 네 양 발목에 바윗돌을 칭칭 감아 매다는 中. 다 끝났다. 둥-둥 잘도 떠내려 가는구나. 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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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 냄새

막 지어낸 이야기 2012. 8. 14. 14:59

'귤 냄새'

 

진짜 귤 냄새인지 귤 냄새 같은 냄새인지 내 코로는 도저히 맡아 낼 수 없는 그 냄새를 대신 맡아주었던 네 이름과 얼굴은 사라진 지 오래인데 귤. 냄. 새. 이 세 마디는 영혼처럼 살아남아 귓바퀴 뒤에 숨어 있다가 심심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귤. 냄. 새. 라고 속삭이고는 숨어버린다.

 

때는 여름이었고 귤이 제 철이 아니었으니 진짜 귤 냄새는 아니었을 것이고 귤 냄새 같은 냄새였는지 비스무레한 냄새였는지. 또 진짜 귤 냄새는 어떤 냄새인지 설명해 본 적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앞으로도 귤 냄새는 이런 거라며 설명할 일도 없을텐데 가끔 그렇게 숨어있다 나타난 그림자처럼 귤. 냄. 새. 라는 울림이 느껴지면 귤 냄새는 어떤 냄새였던가 혹은 어떤 냄새일까 일부러 틈을 내어 생각해본다.

 

이 세상에 귤. 냄. 새.  세 마디 내어 놓은 너도 기억하지 못할 다 부질없는 기억의 잔챙이. 정수리를 지릿지릿 짓누르는 계절감도 무시한 채 양쪽 어깨 위로 동-동 떠다니는 귤냄새귤냄새귤냄새

 

올 겨울에는 아작 씹어서 꿀떡 삼켜버려야지.

 

셍각만 해도 이가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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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연이어 비가 내렸다. 오월의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여름의 기운이 감도는 것이 벌써 여러 해가 되었고 덩달아 이맘때 궂은 비가 부슬거리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시어머니의 운명과 장례식까지 고작 삼일이었지만 사흘 내내 비가 내려 눅눅하고 칙칙한 기운이 지하 장례식장에 상주처럼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고인의 연세 올해로 여든을 조금 넘겼으니 웬만하면 아흔을 넘기고 백수를 누린다는 요즘 어르신들에 비하면 일찍 가셨다 할 수 있겠다. 그래도 환갑을 전후로 암 치레를 한 번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고 그 후로는 이렇다 할 큰 우환은 없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올 여름 들어서자마자 여느 때 보다 기운이 없으시더니 그저 '노환'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병마로 꼬박 보름을 병상에 누워 자식 다섯 남매와 군대에 가있는 손주들까지 줄줄이 챙겨 보시고는 동트기 전 자는 듯이 생을 마감하셨다. 오래 앓다 가신 것도 아니고 크게 앓다 가신 것도 아니고 터무니 없는 사고로 급작스럽게 가신 것도 아니니 남들은 호상이라고 하고 집안 식구도 크게 서러워 하지는 않았다.

집안의 다섯 남매에 한 다리 건너 이종에 고종에 사촌 피붙이들만 다녀가도 사람이 북적거리니 부고를 받고 온 손님들 하나같이 자식농사 하나는 잘 지었다며 큰일 치룰 때는 그래도 식구가 많아야 한다며 한마디 씩들 거든다. 크게 물려받을 재산이 있어 자식들끼리 치고 받는 콩가루 집안도 아니고 번지르한 외제차를 끌고 오는 출세한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업한답시고 없는 재산을 탕진해 먹는 걱정을 끼치는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 고만고만 밥은 먹고 살 만하고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으니 남들 빈말이 아니라 이만하면 자식 농사를 영 못지은 집안은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한 평생은 여자로 보면 나름 성공한 삶이었다. 왜정 시대에 나서 나름 학교 교육을 받아 이름 석 자는 쓰고 해방이 되고 나이 스물이 되기 전에 시아버지를 만나 전쟁 통에 먼저 보낸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마음에 한 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손재주가 좋아 시집을 오기 전 부터도 재봉 일로 친정 살림에 보탬이 되었고 그 기술로 다섯 남매를 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으니 집안 일만 하는 전업 주부도 아니었다. 시아버지는 내가 시집을 올 무렵 돌아가셨던 탓에 기억에는 없고 얘기만 들었는데 면사무소에 오래 계셨다 하니 안팎으로 버는 집이라 크게 어렵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시어머니는 나름 신여성이었다. 당신이 꾸준히 일을 해왔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크게 아들의 역할을 무턱대고 강조하지도 않았고 무리스럽게 자기 것을 챙기지도 않았다. 남편의 다섯 남매 하나같이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없는 설움때문에 어둡지도 않았고 까칠하거나 모나지도 않았다. 적당한 여유와 적당한 편안함. 나는 남편의 그런 적당함이 좋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절한 온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은 내색하지 않아도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묻어나오는 따뜻함이 있었다. 우리 친정도 영 기우는 집은 아니었지만 시댁에 비하면 단촐하고 조금은 서먹서먹한 느낌의 가정이었다.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고 처음 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그때 당시 예비 시어머니는 선생님의 인상에 가까웠다. 억지로 상냥한 것도 아니었고 도도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함부로 대할만한 만만한 인상은 아니었다. 약간 긴장을 한 탓에 살짝 얼어 있는 내 얼굴을 안경 너머로 슬쩍 지켜보더니 안색이 영 밝지는 않구나. 그래도 눈꼬리가 야무진 것이 살림을 날림으로 하지는 않겠다. 평생 볼 사이인데 미간 찌푸릴 일은 없이 살자. 이 세 마디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주는 통과의례를 끝내버리는 쿨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물론 시집이라는 것이 제 집처럼 편하지는 않았겠지만 남의 집안 얘기를 들어보면 나는 상당히 수월한 편에 속했다. 억센 시어머니, 드센 시어머니, 아픈 시어머니가 대부분이라면 우리 시어머니는 좋은 시어머니라 할 수 있었겠다. 당신도 그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노름하는 남편, 술먹고 마누라 패는 남편, 계집질 하는 남편이 아닌 가정에 충실하고 자상하다고 까지 할 수는 없어도 주말이면 마당 청소도 하고 묵은 창고 정리를 취미 생활처럼 하는 그런 남편과의 한 평생을 보냈으니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편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다섯 남매가 수월하고 편안한 것이 오히려 상식적이지 않은가. 남편의 다섯 남매의 특징이라면 좌중을 압도하거나 카리스마가 있다고 할 수는 없어도 가끔 술자리에서 노래라도 한자락 시키면 영 내빼지는 않을 정도의 숫기는 있었다. 다들 자기 중심이 잘 잡혀 있고 성실하며 뛰어난 수재는 아니어도 영민해서 공부로 성공한 집안은 아니어도 직장에서 제 한 몫은 톡톡히 하는 그런 사람들. 나는 내 남편 한 사람보다도 이 집안 전체의 이런 분위기가 더 끌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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