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독

카테고리 없음 2024. 5. 7. 01:09

나흘의 연휴 내내 잤다. 밤에 충분히 자고 늦잠을 자고 다시 낮잠을 자고 초저녁 짧게 잠들었다가 다시 밤이되었고 잘 시간이 되면 또 잤다. 이 정도 자면 잠이 안올 법도 한데 계속 잠이 왔다. 진짜 서울 사람들은 잠온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고 하던데 나는 무늬만 서울사람이라 그런가 졸리다는 말 보다 잠온다는 말이 더 잘 맞는다.

연휴 사흘 째 밤이었다. 아주 오래 전 여행갔던 곳들이 스쳐지나갔다. 그 당시에는 뭔가 삶에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갔던 낯선 나라 낯선 곳이었는데 이제는 사진 한 장처럼 장면으로 남아있다. 몇년을 묵힌 여행의 피로감을 이제야 걷어내는 과정인가. 자고 또 잤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낯선 곳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없어진지 꽤 됐고 여행을 가고싶다는 생각도 없다. 그동안 충분히 축적된 경험 덕에 여행 프로그램만 보아도 낯선 곳에서 돌아다니는 피로감이 느껴진다. 상상력이 풍부해진만큼 새로운 것은 없다. 쉬는게 최고야.

나흘 동안 알차게 잘 쉬었다. 아주 쉴 수 있을만큼 충분히 늘어지게 잘 쉬었다.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주동자

카테고리 없음 2024. 2. 18. 14:17

주동자

    김소연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쓰여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 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아버린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Pulmaya

,

돈은 되지 않지만 내가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엉킨 실을 푸는 것인데

2004년 천안문 광장 바닥에 앉아 한참을 엉킨 연 줄을 풀어내고 다시 날렸을 때의 기억

털실
그냥 실
가느다란 목걸이 팔찌

가성비로는 따질 수 없지만 제대로 꽉꽉 엉켜버린 것들을 말끔하게 풀어내었을 때의 성취감 보람 개운함 너무 좋아서 엉킨 로프 풀기 게임을 하고 있으면 모든 근심걱정을 잊을 수 있어서 좋다. 모든 근심걱정을 잊을 수 있어서 엉킨 로프 풀기 게임을 하고 한 판 한 판 끝낼 때마다 성취감과 보람이 있고 개운해서 좋다. 매일매일 소소한 뿌듯함이 있어 다행이다. 내가 나의 일을 좋아하고 지키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깨지고 바닥을 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블로그 이미지

Pulma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