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2)

막 지어낸 이야기 2012. 10. 24. 14:42

그렇게 아가씨는 한참을 쭈뼛쭈뼛 침을 꿀꺽 삼키다가 입술을 뗄까 말까 망설이더니 그냥 스스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맙니다.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미안한듯 민망한듯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무슨 일이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요."

선생님은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익숙하다는 듯이 가볍게 말을 건넵니다.

 

띠리링 현관문에 달린 종소리를 뒤로 하고 아가씨의 모습이 희미해집니다.

언제 다시 아가씨를 볼 수 있는 걸까요. 다시 볼 수 있긴 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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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는 비가 내렸습니다. 그 바람에 어제는 코끝이 찡하도록 싸늘한 날씨에 우리 모두의 어깨가 움츠러 들어버렸어요. 하루를 그렇게 보낸 덕분인지 오늘은 옷차림도 표정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가는 아이들과 출근 인파가 빠져나간 언덕 위의 골목은 이제서야 한산해졌습니다. 이제 곧 짧아진 해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종종 발걸음을 만날 수 있겠지요.

 

점심 시간이 지나자 언덕 위의 작은 의원 유리 현관문에 조그맣게 팻말이 나붙었네요. 오늘은 환자가 많이 없나봅니다.

 

"기억을 잘라 드립니다."

 

오늘은 또 어떤 환자가 찾아올지, 찾아오는 환자가 있긴 할런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가 되었습니다. 영 차갑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따사롭지도 않은 햇볕을 따라 한 아가씨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언덕을 올라오고 있습니다. 지난 봄 긴 생머리를 드리웠던 바로 그 아가씨였습니다!

 

계절이 두번 바뀐 이제서야 다시 나타난 아가씨는 시간의 흐름만큼 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길게 드리웠던 탐스러운 머리칼을 어깨선 위로 잘라내고 가볍고 발랄한 세팅펌으로 양 옆에 볼륨을 주었는데 귀여운 머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표정은 어두운 편이었어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옅은 그늘이 있었어요.

 

아가씨가 천천히 작은 의원 유리문 앞에 멈춰 섭니다.

손목과 손가락에 힘을 주어 지긋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갑니다.

 

'띠링'

유리문이 열리자 바깥공기와는 사뭇 다른 촉촉한 온기가 아가씨의 코끝을 톡 건드립니다.

안단테정도 빠르기의 바이올린 연주곡이 어깨를 감싸줍니다.

 

잠시 무언가를 적는 일에 몰두하고 있던 간호사 선생님이 고개를 들어 아가씨를 보고 인사를 건넵니다.

"어서오세요, 저희 병원 처음이신가요?'

"아니요. 한 반 년 전에 한 번 왔었는데요.."

"그럼 진료카드 확인해볼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평범한 의원에서 오고가는 대화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몇마디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우연인지 공교롭게도 대기실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아가씨는 진료실로 들어갑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몇 달 전과 변함없이 차분하고 단아한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시간을 무색하게 하네요.

 

"저번에 오셨다가 그냥 가셨죠? 이번에는 어떻게 다시 오게 되었어요?"

초승달 같은 선생님의 웃는 눈에 걸맞는 따뜻한 목소리에 아가씨는 살짝 미소지으며 목에 둘렀던 머플러를 풀어내며 입을 엽니다.

 

"선생님이라면 절 도와주실거라는 믿음이 생겨서 다시 왔어요."

아까까지 옅은 그늘이 졌던 아가씨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밝아지더니 두 눈동자에서 빛이 반짝 납니다.

 

"그래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볼게요.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기억을 잘라주신다고 하셨죠? 그럼 잘려나간 기억들을 다시 이어 붙이는 것도 가능할까요?"

 

이번에는 선생님의 얼굴에 전에 없던 홍조가 돌며 두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가며 표정이 또렷해집니다.

그러고는 선생님이 대답을 이어갑니다.

"음. 서로가 서로를 믿고 노력하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 천천히 환자분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까요? 무슨 이야기든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단호하지만 재촉하지 않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아가씨는 큰 힘을 얻습니다.

 

이제 아가씨는 이야기를 풀어낼 준비가 된 걸까요? 궁금해서 심장이 콩닥거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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