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쇠고 나면 제대로 해가 바뀐다. 때를 넘기지 말고 해야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것 같아서 두서없더라도 몇 자 적는다.

1월 초에 딱 1년을 채우고 퇴사를 했다. 끝없는 과로와 어수선한 감정에서 탈출했다. 2월 초까지는 이런 저런 일로 엮여서 그만 둔 것이 실감이 안났지만 어쨌든 끝은 났다. 일을 그만두면서 동시에 일본 워크샵을 다녀왔다. 홋카이도는 아름다웠지만 역시나 혼자 자유롭게 가는 여행이 가장 좋다. 그래도 덕분에 하루요 언니와 극적으로 재회했고, 선물로 유자차를 잘 전달하고 왔다. 적게 쓰고 적게 먹더라도 자유의 중요함을 잃지말아야 하겠다.

논문 주제를 정하고 목차를 이래 짜보고 저래 짜보고 자료를 들췄다 메모를 했다 짱구를 굴렸다 방에서 뒹굴다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잠자리에서 뒤척이다 딱 한 달 만에 주제를 엎었다. 속이 다 시원하고 후련하고 홀가분했다. 내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 비로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내 격과 수준에 맞는 결정이 이렇게도 편할 수 있구나. 앞으로도 살면서 이 느낌을 잊지말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겠다. 주제를 갈아엎고 진짜 모처럼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푹 잠들었다. 이런 기분도 처음 느껴봤다. 내 스스로 내 분수에 맞는 결정을 하고 그에 따라 느끼는 안정감이라니. 잊지말자. 잊지말자.

이제 논문 쓸 일만 남았다. 그래도 1월 알음알음 쉬었다.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쇼핑도 하고 목욕도 하고 온양에도 다녀왔다. 좋을 때는 한없이 좋고 부딪혀 스트레스 받을 때는 너무 싫지만 어쩌겠나. 부모자식 간인데.

마음에 드는 우산이 있는데 너무 비싸서 못산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예슬이와 한슬이 데리고 노르망디 전시회 갔다가 쿠쉬전 기념품 매대에서 본 꽃우산이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린다. 잊자. 잊자.

조금은 더 쉬고싶다. 살짝 불안하지만 이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좋고 여행도 다녀오고 싶은데 여건은 그닥 좋진 않다. 여행을 못가더라도 좀 더 쉬고싶은 마음이 든다. 모든 것이 미정인 불안한 상태. 뭔가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 기분이지만 그래야 번지점프라도 할 수 있는게 지금 상태이니 현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감정에 동요하지 말자. 단단하지만 투명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싶다. 양갱같은 인간? 비누같은 인간이 되면 좋겠다. 지저분하게 흔적이 남지 않고 향기로 남는 사람이 되고싶다. 논문 잘 써보자. 해는 바뀌었지만 아직 묵은 해에 살고 있는 이 느낌. 정신 가다듬고. 1월 흘려보낸 만큼 더욱 단정하게 논문에 집중하자.




블로그 이미지

Pulma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