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

Pulmaya 머릿속 2012. 7. 20. 00:56
그런 날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것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것이 딱 꼬집어 요거다 하기 참 뭐한 그런 날-

그런 글도 있다. 시도 아닌 것이 소설도 아닌 것이 수필도 기사도 아닌 그런 글. 누구는 생활글이라 하고 누구는 잡문이라고 하는데 꼭 그렇게까지 험하게 부를 필요있나. 그냥 그저 단 한마디 글.이라고 부르면 그만인 것을-

어릴 적의 나는 책귀신이었다. 엄마의 기억대로라면 내가 글을 익히게 된 계기는 내 동생이 아직 우리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나는 채 두돌이 되지 않았고 온 몸에 에너지가 가득넘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집안을 빨빨거리며 뛰어다녔는데 때마침 아랫집 언니는 고3이었고 독서실 갈 형편은 못되었고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공부를 하는데 윗집 꼬맹이가 또르르르 쪼르르 맨날 뛰어다니니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아랫집 아줌마가 간절하게 우리 엄마에게 애원하기를 올 여름에 애기가 나서 우는 거야 그때가서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제발 우리 딸내미 공부 하다 신경질 안내게 이 집 애기 좀 못뛰어다니게 해달라고. 스물여덟 우리 엄마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특단의 조치로 과감하게 육십권 짜리 금성출판사 그림동화 전집을 지르며 하루에 한 권 씩 두달을 버티고 한 번 더 돌려보면 서너달은 버티겠거니 했지만... 하루에 한 권은 무슨 두세권 씩 마구 진도나가버려 채 한달도 안되어 육십권의 맨마지막 책이 핸젤과 그레텔이었는지 성냥팔이 소녀였는지 그랬는데 뱃속에 내 동생은 책만 읽어주려하면 그렇게 졸았대나- 동생이 졸았는지 엄마가 졸았는지 이제는 알 길이 없고 나는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열 번 읽어 그 십이페이지인지 십육페이지 정도 되는 그 책을 어느새 씹어먹어버리듯 싹싹 소화해내더니 어느 날 부터는 뽀뽀뽀와 우유를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읽더니 한 날은 그 옛날 기름회사 유공의 유를 우유의 유라며 엄마를 가르쳐 엄마가 기겁을 했다나 깜놀을 했다나.

어쨌든, 가르쳐 준 적은 없지만 알아서 배운 글자랑 친구먹고 책볼때는 밥도 안먹고 물도 안마시고 잠도 안자고 그냥 책만 읽는게 고삼때 까지도 그래 지내다 재수하고 대학오고 나서 그제서야 책 아니라도 재미있는게 많다는 걸 알았는데 마지막으로 식음수면 전폐하고 읽은 책은 이천오년 이월 외가에서 빌려온 조정래 아리랑 태백산맥 스트레이트로 나흘동안 읽은 기억이 끝이고 그 다음부터는 이상하게 책만 잡으면 채 열장도 한번에 읽어내리는게 쉽지 않았다. 근 이십년을 내 몸속에 함께하던 독신(讀神)이 떠나가신 듯 했다.

그 후로는 사는게 별다른 즐거움이 없고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어 다시 독신님 강림하시라고 틈틈이 기도해보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 백면서생 꽃놀음은 그만하고 먹고 살 궁리 하며 살라고 그 분이 다시 안오시는갑다.


아 그런 날 다시 올까.

몇 손가락 안에 들 너를 처음 만났던 특이하고 특수하고 특별했던 그날같은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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