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남의 나라에 도착한지 딱 일주일.

30년 인생에서 참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폰이 고장나는 바람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 속이 하얗게 리셋되는 경험도 해봤고...

오기전에 생각하고 왔던 계획들은 판판이 다 깨지고,

또 생각치도 않았던 새로운 기회도 눈 앞에 턱 떨어졌습니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상황과 환경이 아닌, '나의 태도'였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그저 '주변인'으로 살고 싶다는 어줍잖고 같잖은 마음가짐이 문제였던거죠.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고 (심지어는 내 자신조차도)

눈치 슬슬 보다가 얹혀가고 싶어했고

좋은 것만 취하고 싫은 건 죽어도 싫다고 버티고

과정없이 결과만 있기를 바라고

일일이 나열하면 한도 끝도 없을 민망한 치부들과 마주하고 나니 괴로움은 잠시고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군더더기와 가지를 치고나니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도망다니지 말고, 정면승부 할 것'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가진 것이 별로 없었으니 참 다행입니다.

조금 더 묵묵하고, 무거워지고, 신중해지고, 차분해져서 돌아가겠습니다.

'깨닫기만 하면 바뀌는데는 채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낮아지면 평평해지고, 평평해지면 넓어진다'

이제야 무슨 뜻인지 조금 알겠습니다.

진심으로, 다들 너무 보고싶습니다.





# Today's SPCL
우연한 기회에 네팔에서 썼던 글을 이제서야 올려봅니다.

-네팔에서의 석 달

네팔에 다시 온 지 오늘로 꽉 찬 석 달이 됐다. 작년 이맘때 얼떨결에 보름 여행을 하는 동안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에 한국인 부부를 만났는데, 참으로도 묘한 인연이 되어 그 집은 아예 네팔에 터를 잡고 살고, 나도 덩달아 조카님들 겨울 방학 무렵 다시 네팔에 오게 되었다. 언니와 형부가 한국에 계신 동안 애 셋의 돌봄을 받으며 혹독한 겨울을 봄날처럼 보내는 중이다.

네팔이라는 나라는 외국인 영주권이 없어 여행객이나 교민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라 한다. 1년에 2만 명에 가까운 여행객에 비해 터를 잡고 살거나 봉사활동으로 장기 체류하는 사람은 500이 조금 안되는데, 난 이도저도 아닌 주변인이나 다름없다. 작년 봄, 잘 다니던 회사까지 때려치고 무슨 굼벵이기운이 들어 집에서 뒹굴거리며 잉여의 여왕이 되기를 갈망하던 처지나 지금의 처지나 이도저도 아니긴 매 한가지다.

사람 일이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정말 내가 여기 네팔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한 살 더 먹게 될 줄이야. 여행자의 처지보다는 자연상태의 칩거백수에 가깝다보니 해외라 하더라도 크게 낯선것이 없고 이미 두 번째이니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것들이 더 많아진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스스로는 요즘 해외은둔형외톨이라 칭한다.)

그래도 생활 면면을 쪼개어 살펴 보자면, 3층집 옥상에 가끔 빨래 걷다 보면 저멀리 북쪽으로 산꼭대기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히말라야의 장관이 여기가 바로 네팔이라는걸 확인시켜준다는 정도? 또 하나는 아직 전기 사정이 열악해 해가 지고 정전이 되고 나면 골목길도 깜깜해져 바로 옆집 수퍼라도 갈라치면 손전등을 켜고 다녀야 할 정도인데, 그럴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 보면 정말 말그대로 별이 쏟아질 것 같다. 작년 안나푸르나 트레깅 중에 보았던 밤하늘은 빈 공간 보다 별이 더 많았었고, 여기 카트만두 밸리의 하늘은 그때와 비교해보면 상대도 안되겠지만 그래도 한국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여름 하늘 정도는 되니, 새삼 빛도 공해가 된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여행 왔을때는 문명의 손길이 다소 덜 탄 자연의 느낌이 마냥 좋았는데, 살아보니 참으로 고생스럽다. 여기 네팔은 아니지만 인도에 나와 있는 후배와 메신저로 이야기를 하는데, '개판과 평화의 어중간함'이라는 표현을 듣고는 참 적나라하면서도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에 혼자 한참을 눈물나게 웃었다. 시스템은 우리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게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집집마다 알록달록 꽃도 키우고, 골목길에 멍멍이들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모습과 현지인들의 시골 사람들같은 수더분함은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평온함이었다.

대부분의 전기는 수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는데 건기인 요즘은 하루에 전기가 열여섯 시간씩 나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 앞판을 열어야 볼 수 있는 커다란 배터리를 집에 놓고 전기가 들어올때마다 충전해 쓰는데, 그나마도 간당간당해지면 집안에 전등과 콘센트는 다 뽑고 오로지 무선인터넷만 켜놓은 채로 스마트폰을 쓰고 노트북을 쓰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우리나라같은 온돌 시설이 없어서 낮에도 집 안이 바깥보다 더 추운 단열이 거의 안되는 집들이 허다한데 겉모습은 인도나 홍콩식의 서양식 주택을 따라 지어 겉으로는 세련되고 이색적으로 보였지만 살아보니 창고에서 침낭 펴 놓고 오리털 내피 입고 들어가 자야하는 꼴이다. 이래서 살아봐야 아는가 보다. 여행자의 느낌과 생활인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도로는 우리와 반대로 자동차 좌측통행이다. 거기까진 괜찮은데, 도로의 반이 비포장이다! 여기는 그래도 나름 수도인데!!! 처음 와서는 좀 돌아다녀 보겠다고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 열심히 연습해서 끌고 나갔다가 비포장 도로 위를 한 30분 지나고는 하반신이 마비되는듯한 통증을 느끼고는 포기했다.

여기도 실업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낮에도 길가에는 체스나 마작같은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고 관광산업이 국가 수입 대부분을 충당하고 외국의 원조로 자동차 도로를 닦는 실정인데, 어떻게 다들 굶어 죽지는 않고 살까 생각했는데 도시인데도 집에서 닭키우고 텃밭에 채소 심어 가꾸는걸 보니 식량은 자급자족을 많이 하나보다. 우리 앞집은 청둥오리도 네마리나 있었는데 요즘 안보이는걸 봐서 잡아 먹은 모양이다. 나도 여기 와서 집에서 닭을 두마리나 길러서 순차적으로 잡아 먹었는데, 일단 잡기는 이웃집에다 비용을 지불하고 잡았지만 손질은 내 몫이었다. 암탉 뱃속에 아직 나오지 않은 달걀이 몇개씩 있는걸 태어나서 처음봤고, 본능적으로 모래주머니를 찾아 깨끗이 씻어서 구워 소금간에 찍어 먹으며 잠시 행복하다는 생각도 했다. 고기 값은 우리나라에 비해 싼 편이라 돼지고기 1kg에 우리돈 3천원정도인데, 뼈와 비계, 껍데기의 구분없이 무게로 달아서 팔고 있었다. 나도 한국에서는 엄마가 해주시는 밥 얻어 먹으며 곱게 자랐는데 여기와서 처음으로 식칼들고 돼지고기를 해부수준으로 난도질 해봤다. 한국에서는 정말 손쉽게 먹었던 단무지, 짜장소스, 팝콘을 원재료 단계에서부터 만들어 먹다보니 내 입에 들어갔던 수만가지 음식들이 어디로부터 왔을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그리 손쉽게 먹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역시 고생을 좀 해봐야 배운다.

수십만명이나 된다는 신들이 벽에 조각된 사원이나 알록달록 그림을 그린 트럭같은 이국적인 풍경은 일찌감치 익숙해지고,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문제의 고달픔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물론 옥상에서 보는 히말라야와 상쇄된다 하더라도 힘든건 힘들다.

그래도 한국이 좋으냐 여기가 좋으냐 이분법적으로 자문해보면 아직은 네팔이 좋다. 이따금 담을 넘어오는 이웃집의 향피우는 냄새는 생활에서 오는 피로를 씻어줄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편하게 해준다. 한국에서는 경험할 기회조차 없었던 전기부족과 깨끗한 물 부족은 약 30년 내 인생에 얼마나 불필요하게 지구자원을 낭비했던가 반성하게 한다. 또 스스로 일상생활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매사에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수고에 참 편하게 살았다 싶다. 아직 고생을 덜했나보다. 정말 한국의 모든 것이 그립고 아쉬운 때가오면 미련없이 떠나겠지. 그러고 다시 한국에서의 일상에 적응하면 히말라야의 설경과 늘어지게 낮잠자는 멍멍이를 그리워하겠지. 몸은 어느 곳에 있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너그럽고 즐겁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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