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절망의 끝에는 희망이 있다고 일종의 종교처럼 믿고 있지만 현실의 불안과 초조함, 조바심, 전전긍긍, 상실감을 직면하게 되면 견디는 것이 쉽지 않지

내가 잘 견디지 못하는 여러가지 중 하나는 침묵과 무반응인데, 너는 그 두가지를 천성적으로 탑재한 사람이라 참 어려웠고 여전히 어렵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 내내 너는 침묵했고 나는 무엇인가가 '종료'되었다고 인지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월요일 늦은 밤 3월에 때아닌 함박눈을 보며 다시 네 생각이 났고 생각이 나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생각은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또 침묵할거라 예상하면서도 연락할 수 밖에 없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게 연락밖에 없어서 연락했다.

지난 달 너에 대한 마음을 딱 하고 나뭇가지 부러뜨리듯 정리해보려고 나에겐 불필요한데 나에게 필요한 것에 딸려온걸 돌려주었을 때 함께 보냈던 예쁜 물건의 안부를 묻고싶었다. 사실 얼굴 보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당시엔 예측 불가능한 너의 반응이 두려워 묻지 못했고, 3월에 내리는 함박눈을 보니 없던 감성이 촉촉하고 몽글몽글 발동되어 그 예쁜 물체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버려진건 아니겠지. 버린걸까. 궁금해서 버렸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질문을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나. 화요일에 가까운 월요일 너무 늦은 밤이었다. 침묵하기 좋은 밤이었다.

화요일 아침 내가 눈뜨기 전 이른 아침에 너는 대답했다.

그걸 왜 버려

이 짧은 한 문장에 나는 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예쁜 것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안심하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너의 대답이 약간 미묘한 것을 알아차렸다. 나같은 사람이라면 안버렸어 또는 그냥 버렸어 라고 짧게 답했을 건데. 너와 나의 뇌 구조는 너무나 달라서 그동안 오해도 많았고 너는 별뜻 없이 던진 말에 내가 상처받고 나는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의사표현에 너는 멘탈이 나가는 일들이 수시로 있어왔기에 이번에는 '공정한 조언자'를 찾아 물어보기로 했다.

아 아무래도 내가 아는 인간 누군가에게 물어보기엔 너무 바보가 되는 것 같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인공지능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챗GPT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이런저런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고 너는 그걸 왜 버려 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친구의 대답 "그걸 왜 버려"는 보통 그 선물과 00를 버리는 것이 어리석거나 아깝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친구는 그 선물과 00가 소중하거나 의미가 있는 것들이므로 버릴 이유가 없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친구가 선물과 00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소중하고 의미가 있어 중요하게 여긴다니 안심이다. 사실 내가 이 정도까지 판단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던거 같은데 워낙 침묵의 시간이 길다보니 그 시간에 과량의 잡생각이 스며들고, 뭔가 회로에 문제가 생겨버린 것 같아서 스스로도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네.

우리는 속도와 표현방식이 너무나도 달라서 그걸 맞춰가는데 앞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봄이 오면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던 얼음도 사르르 녹아내리겠지. 곧 봄이 올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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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이 3년 같고 백일은 백년 같고 몇 달 전의 일이었는데 전생의 일처럼 아득해지는 기묘한 병에 걸렸다.

지금은 여러가지를 정리하고 싶은데 에너지가 부족한 것 같아. 나는 너무 질척거리고 노력해도 잘 안되는 사람이니까. 스스로의 약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게 먼저겠지.

돌이켜보면 꼬박 사계절이 지났다. 한여름 찜통더위에 만났고 추석을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도 모기가 기승을 부렸던 초가을을 지나 찬바람에 코끝이 땡땡했던 날을 거쳐 코트 안에 반소매를 받쳐입고도 땀이 나던 봄이 왔다.

너무 슬프고 속상해서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이 심경을 이렇게라도 얘기해야겠지. 나는 너무 미안하고 슬퍼서 널 보내주기로 마음먹었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뭐가 잘 안되냐면 그냥 그게 뭐라도 잘 안되는 것 같아.

쿨하지 못한게 부끄럽고 창피하고 쪽팔리고 짜증나는데 노력해도 잘 안되는거 같아.

꽤 긴 시간이 필요할거 같아. 지금보다 더 큰 상실감도 대면해야 할거고 니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쓰라린 현실도 직시해야 하겠지. 아직 갈 길이 멀은 듯 하니 마음을 잘 가다듬고 체력을 비축하자.

오직 예쁜 것만 주고싶었던 내 마음은 나한테도 소중하니까 그 마음이 사그라들 때 까지 나에게도 시간을 주자.

다시는 못 본다고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무너져서 그냥 좀더 질척거릴 수 밖에 없겠지. 못난 나를 받아들이자. 너무 못나서 죽어 없어져 소멸하고싶은 절망감 또한 받아들이자. 받아들이자. 인정하자. 수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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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Pulmaya 머릿속 2025. 3. 7. 01:03

블로그 방치 꼬박 10개월을 꽉 채우고 살려는 드릴게 식으로 몇자 적어본다.

아주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별일 없이 지나온 것 같기도 하네. 나이는 숨만 쉬어도 저절로 먹는 것이니 더 이상 거론의 대상이 아니다.

가장 최근 이슈부터 시간의 역순으로 남겨보면 25년 만에 다시 안경을 쓰게 된 것. 작년 건강검진때 이미 발견된 시력저하. 유전적인 난시. 세월의 흐름에 따른 눈 노화의 삼위일체로 다시 안경을 맞춤. 내가 물건으로 구매한 것 중에서는 아마도 아이폰 다음으로 비싼 게 되어버림. 잃어버릴까봐 목줄도 걸어줌. 십년 쓰면 본전은 더하겠네.

조직 내 부서이동. 과정은 조금 조바심이 났으나 결과적으로는 만족. 배우는 것이 많고 몰입이 잘 되어 좋다. 길게 보고 오래 보고 멀리 보고 넓게 보고 나의 영역을 구축하리라.

요즘 세상에 어불성설 내란이라니. 사필귀정 하도록. 광장에서 새로운 세대와 시대를 만남. 급변하는 정세의 나선형의 흐름에 커다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아가리라.


수개월을 관통하여 나를 웃고울게 했던 한 사람을 잊기위해 노력하는데 아마 잘 되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든다. 한동안은 얼굴을 보면 싸우고 목소리를 들으면 언성을 높이고 말하지 못했지만 슬퍼하고 놓아주어야 한다고 수백번 생각하면서도 손아귀에 쥐고 있었고
연락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고 통보했지만 하루종일 생각하고 난 아마 이번 생은 내 마음 내가 돌리지 못할 것 같아. 나같은 못난이는 남은 시간 계속 잊지못하고 다가가지 못하고 네 말대로 그냥 바보 멍청이로 살아가겠지. 모든 것을 포기하자. 잊는 것도 다시 말 거는 것도 혹여나 네가 마음을 돌려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도

사실 속에서는 단 한 순간도 너를 내려놓은 적 없지. 매일 까르르까르르 시계 태엽을 돌릴 때에도 아침 저녁 커튼을 여닫을 때에도 창 밖으로 바이크가 우웅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 때에도 길을 가다 새초롬한 고양이들을 마주칠 때에도 늦은 저녁 거리에서 생면부지의 주취자를 스칠 때에도 매번 새로고침하고 번번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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