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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23

 

'거 참, 공식이 딱 맞아 떨어진단 말이야.'

'네? 무슨 말씀이신지?..'

'과거를 기억해 낼때는 눈동자가 왼쪽으로, 없었던 일을 상상할때는 오른쪽으로. 방금 네 눈이 그렇게 움직이네. 왼쪽으로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별 것 아닌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잠시 생각좀 했을 뿐인데 뭔가 몹쓸 것을 들켜버린듯이 부끄러워졌다. 딱히 숨기고 감춘 것은 없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내 앞의 그가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이 오묘했다.

 

신발을 벗고 마주앉은 밥상의 오른쪽으로 상이 둘이나 더 있었지만 때를 넘긴 저녁시간에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의 한적한 일식집이라 더 이상 들어오는 손님은 없다. 이따금 바깥 홀의 소음이 살짝 방해가 되기도 했지만 시선을 가려주는 미닫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은 분리되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으나 마치 식당 하나를 전세내어 둘만의 식사를 하는 것 같은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다. 고급 일식집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일식집인데 밥상 위에 날생선은 한 조각도 없다. 먹어줄만한 탕요리 하나, 잘못 먹었다간 입천장이 다 벗겨질법한 바싹 구워진 생선구이 하나. 그나마도 오고가는 대화때문에 밥그릇은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상태였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오고간다. 남자의 중저음이 낮게 깔리고 나면 여지없이 거의 같은 길이의 분량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다시 남자의 중저음이 리드를 한다. 말이 끊기기가 무섭게 여자의 목소리가 빠른 템포로 따라붙는다. 잠시 틈을 두고 남자의 중저음이 짧게 되받아친다. 이번에는 조금 더 틈을 두고 여자의 목소리가 더 짧게 맞받아친다. 여자의 목소리는 꼬박꼬박 대답을 한다. 혼자서 경쟁하듯 말꼬리를 놓치는 법이 없다. 남자의 중저음은 급할 것이 없다. 계속해서 말소리가 오고간다.

 

'어떤 여자가 결혼을 하고 애를 셋이나 낳았지. 그런데 하루는 기분이 좋지 않다고 방에 쳐박혀서 울고 있었어. 남편이 와서 얘기했지. 여보, 이제 그만 울고 나가요. 오늘 우리 셋째 생일이잖소. 여자가 대답을 했지. 그쵸. 내가 잘못하고 있는거죠. 내가 나쁜 년인거죠.'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면 안되요?'

남자는 대답이 없다. 여자는 이런 선문답같은 대화는 익숙치않을뿐더러 불편하다. 이 두사람 밥상머리에서 밥은 안먹고 뭐하고 있는건가. 심기가 불편하니 속이 메스꺼워진다.

 

결국 밥그릇은 둘 다 비우지 못했다. 반찬접시도 남겨진 채 그대로다. 뚝배기 안에 뱅 둘러 찬 벌거죽죽한 탕의 가장자리는 바짝 말랐다. 생선구이는 애초부터 구리구리한 갈색이었고 촉촉함을 잃은지 오래다.

 

미닫이 문이 드륵 열리고 분리되었던 이쪽과 저쪽이 다시 만났다. 무엇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합이 만오천원. 유리문 모서리에 달린 말라비틀어진 생선구이 색깔의 작은 종이 땡그랑 울린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건조한 찬 공기가 여자의 콧구멍으로 스륵 하고 빨려들어가더니 순간 명치끝이 저릿한다. 여자는 불편함에 왼쪽 윗배를 움켜잡는다. 뭔지 모를 억울한 덩어리들이 울컥 올라온다.

'왜그래? 어디가 불편하니?'

'그냥 좀 속이 안좋아서요.'

앞서 가던 남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질문한다. 그러고 나서는 배를 움켜쥐지 않은 여자의 왼손을 당겼다 놓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다. 정 못견디겠으면 그냥 게워내라.'

'네. 그래볼게요.'

남자의 중저음은 변함이 없다.

 

곧 여자는 남자의 지시대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좌변기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는다. 먹은 것이 없으니 딱히 나올 것도 없는데 게워내라 하였으니 그렇게 한다. 공연히 쿠르르릉 아까운 수돗물만 하수도를 향한다. 

 

 

 

2011. 7. 28 

 

영화 Mr. Nobody

아주 우연이었다. 지구상의 마지막으로 죽는 인간. 주인공에게는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노란 금발의 생머리의 여인이 울고 있다. 셋째 아이의 생일이다. 주인공은 우리 막내의 생일이라며 그 여인을 달랜다. 울먹거리던 여인은 그럼 나 지금 나쁜 엄마인거지 하며 거실로 뛰쳐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미친듯이 깔깔거리고 떠들며 즐거운 생일파티를 한다.

 

여자는 이제서야 암호를 풀었다. 암호를 푼 것과 동시에 주문에 걸렸다. 아직 있지도 않은 셋째 아이 생일에 울고 자빠져 있는 그 여인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때 남자는 왜 그 이야기를 한 것인지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나는 주문을 풀기 위해 지난 삼십년동안 축적된 지식을 총동원해보았지만 풀어낼 수가 없다. 도대체 셋째아이 생일날 울고 자빠져 있는 나쁜 엄마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해답에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2011. 8. 15

 

셋째 아이 생일에 울고 나자빠져 있는 나쁜 엄마가 되는 주문을 푸는 법을 찾았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그 남자의 아이를 셋이나 낳을 필요도 없고, 그러면 그 남자와의 셋째 아이의 생일에 울고 있을 필요도 없는 거였다. 답은 찾았지만 개운하거나 유쾌하지 않다. 주문을 풀기 위해서는 다른 남자가 필요해 진 것이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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