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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지난 7월 26일 매월 첫째 주 전월의 '월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부지런하지도 못하고 게으른 탓에 매일 꼬박꼬박 일기를 쓰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고,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1년에 열두번은 쓸 수 있겠다 싶어 횟수를 그리 정했다. 또 1년에 12번, 10년이면 120번 56년이면 대락 675에서 676회 정도 되는데, 얼마전 결심 수명을 99세에서 87세로 단축시켰기 때문에 앞으로 56년 676회 정도의 기한으로 월기를 쓰고 생을 마감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한 달에 한 번이면 대단히 번거로운 일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56년 짜리 장기적인 무언가를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심정은 떨리고도 설레며 끝까지 완수해 낼 수 있을런지, 676회를 쓸 때까지 살아는 있을런지, 676회를 다 썼는데 계속 살아있으면 그 이후에도 계속 써야하는 건지 등등의 잡생각이 든다. 중요한 건 일단 쓰고 보는 거겠지.

 

 수단과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최근에는 노트북을 펴고 키는 것도 번거로워 두 손에 폰을 꼭 쥐고는 양쪽 엄지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무언가 써내려가는 일이 잦아졌는데, 월기만큼은 노트북으로 쓰기로 했다.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며 걸러낼 것은 걸러내고 정리할 것은 정리할 시간도 필요할 것 같고, 침대에 널부러져 쓰는 것 보다 그래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쓰는 것이 스스로의 한달을 정리하는 과정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시기는 매월 첫째주 목요일에 쓰기로 마음 먹었다. 부득이한 경우 금요일에 쓰되 첫째주 주말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복잡한 월말을 피해 월초로 시기를 잡았는데 시간이라는 것이 오묘해서 가면 갈수록 사람의 감각과 기억을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첫째주 목요일에 노트북이 고장나서 금요일까지 못고친다면 그때는 폰으로 쓰도록 한다.

 

 자료의 축적은 티스토리가 망하지 않는 한 계속 여기 이 블로그에 하고, 혹시라도 서버 장애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한글파일로 저장해서 메일에 보관한다. 그 옛날 왕실의 실록에 비할만큼 중한 자료는 아닐지라도 이 기록은 나 아니면 이렇게 지켜줄 사람이 없으니 나라도 실록을 모시듯 해야 하지 않겠나. 1년 치의 기록은 출력을 해서 보관을 하고, 10년 치의 기록은 제본을 해두면 그때가서 또 색다른 의미가 있을 듯 싶다.

 

 그럼 이제 서론은 이만 하고, 써보기로 하자.

 

 

-2012. 07_곰국

 

 참으로 불안한 한 달이었다. 생애 마지막 독립이랍시고 차려 놓았던 살림을 내 손으로 하나 하나 정리하고서는 면목없는 표정으로 이렇다 할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집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30년 인생에서 이번 달 만큼 불안하고 정신 사나운 달도 없었다. 단거리용 경비행기가 연료가 떨어져 불시착한 마냥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린 듯 했다.

 

 이번 달에 가장 고민하게 되는 부분은 '책임'의 문제였다. 내 인생, 내 진로, 내 미래. 나는 나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답이 영 나오지 않는 것이 신통치 않다. 오래 전에 읽었던 어느 책의 글귀에서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것이라는 그 거창한 문구가 양쪽 어깨를 짓누르면서 자신감도 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버리고, 본의 아니게 실없는 사람이 되어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다 별 실속도 없이 다시 백수상태가 되어 버려 면목도 없고 그저 민망할 따름이다.

 

 온 도시 전체가 곰국을 끓이고 있다. 며칠 외가에 다니러 가는 엄마가 남겨진 자식들을 위해 커다란 스테인리스 들통에 한가득 곰국을 끓여 부엌은 물론이거니와 집안 전체에 그 열기가 퍼져 푹푹 찌는데도 그게 몇날 며칠은 일용할 양식이 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묵묵히 기다릴 수 밖에 없듯이 한여름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지난 한달동안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얻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돈, 직업, 보금자리, 자신감, 일시적인 희망, 일시적인 꿈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돌아보니 불안감과 그 불안감 속에서 동요하지 않는 스스로의 더딘 성장을 얻은 것 같다. 남 탓하지 않기. 나의 과오를 겸허히 받아들이기.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계속 훈련이 필요한 부분이다. 왠지 죽기 전까지는 계속 아마추어일 듯 하다. 늘 미숙하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좌절할텐데 조금씩 더 의연해지면 어느 순간에는 조금 덜 불안하겠지.

 

 사람들이 자꾸 묻는다. 뭘 하고 싶냐고. 나는 뭘 하고 싶은걸까. 언제 답을 찾을까. 그 답이 과연 있기나 한 걸까. 그래도 소기의 성과라면 목표 두가지가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칠순기념으로 미니스커트 입고 남미로 여행을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팔순기념으로 광동화를 배워 홍콩여행을 다녀오는 것이다. 나이 마흔과 쉰, 환갑 때의 목표는 차차 세우기로 했다.

 

 7월의 마지막 주 주말엔 거의 10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에 오랜만에 만났어도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는데, 10년의 틈은 어느새 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어색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반가움은 반가움대로 있었지만 서로가 영향을 주지 않고도 독립적인 개체로 살아왔던 만큼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그 친구는 수다로 풀고 싶은 생활의 스트레스가 나에겐 그저그런 라디오 소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크게 개입해야 할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잘 살면 될 것 같다. 갑자기 내가 좀 늙은 것 같다.

 

 월기를 쓰기로 마음먹고 첫번째 쓰는 것인데 조금 더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쓰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그냥 숨기지 않기로 했다. 없는 것을 꾸며내고, 있는 것을 감추기에는 사실 좀 여유가 없다.

 

 얻은 게 영 없는 건 아니다. 면허 딴 지 7년 만에 갱신도 하고 졸업한 지 2년 반 만에 교원 자격증도 찾아왔지만 지금 당장은 쓸데가 없다. 언젠가 써먹을 날이 있을 거라며 길가에 굴러다니는 아이템 줍듯 수거한 것인데 그 언젠가 먼 훗날에 밑천이 될 날이 있겠지.

 

 얼마 전에 '덤덤하게 얘기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으면서 연상 작용으로 작년 봄, 올해 봄 똑같은 말을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덤덤하게 말하기 힘든 일들에 대해 덤덤하게 말하는 내 자신을 보며 감정선에 살짝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냥 나이먹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나간 일들에 대해 감정을 남기는 것이 스스로에게 큰 도움이 못된다는 걸 깨달아서 그런 것도 같고...

 

 31일을 꽉 채운 7월이 지나갔는데 또 31일을 꽉 채울 8월이 시작됐다. 집안 구석구석이며 길거리에, 대로변에, 온 천지에 여전히 묵묵하게 곰국을 끓이고 있다. 8월을 잘 버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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