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숨만 쉬어도 목덜미로 땀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리던 무더운 지난 여름에 올 겨울에는 꼭 요놈의 귤들을 죄다 씹어먹어버리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선뜻 귤을 볼 낯이 없었고 막상 귤과의 대면에서 번번히 눈을 내리깔고 뒷걸음치기 일쑤였다. 귤을 씹어먹긴 개뿔. 손끝이 시려 껍질도 제대로 까지 못하고 정작 한조각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기라도 하려고 하면 어금니 속을 파고드는 차디찬 과즙의 냉정함때문에 금세 후회가 밀려들곤 했다.

이제 조금 정신이 든다. 귤은 그저 귤일뿐이며 너와 난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착착 너의 껍질을 까내고 아삭아삭 너의 육질을 씹어가며 꼴깍하고 너의 과즙을 목구멍으로 넘길 순 있어도 너는 나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나 또한 너에게서 분리되어 있음을. 식도를 지나 내장을 거쳐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신진대사의 과정을 통해 너는 잠시 나를 거쳐가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의 피가되고 살이되며 맑은 향기로 나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며 조막만한 너의 희생정신으로 이 겨울이 상큼해진다.

이제 수시로 귤을 먹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요즘같이 발달된 세상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사시사철 귤을 만날 수 있고 또 귤의 종류도 많아졌을뿐만 아니라 맛도 각색이니 애초에 우리의 만남은 찰나였겠지만 귤이 멸종하지 않는 이상 나는 매년 겨울 혹은 백화점의 매대에서 제철이 아닌 생뚱맞은 귤을 만날 때마다 너와 다른 귤을 만나면서도 너를 만날 수 없는 지극한 슬픔을 느낄텐데. 이미 너는 흙으로 돌아간 후였으니 이제는 흙을 보면 귤의 모습을 한 너를 떠올리게 될 것이고 예전에는 귤만 보아도 슬픈 것이 이제는 흙을 보아도 슬퍼지는 슬픔의 확장을 느끼며 더이상의 슬픔의 확대재생산은 용납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아마 몇번의 겨울이 다시 도래하여도 귤을 씹으면 모래를 씹는 맛이 날테지만 어느새 그 모래맛은 다시 상큼한 귤 고유의 향미를 되찾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이제 푸념은 그만하고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

차갑게 시린 손에 조막만한 귤 하나를 쥐었는데 귤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너의 손에 귤을 쥐어준다. 온기를 전해본다.

'막 지어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치를 열심히 했다  (0) 2015.06.22
도넛 드실래요  (0) 2015.04.30
뒤꿈치  (0) 2012.12.30
冬眠  (0) 2012.12.22
제 정신  (0) 2012.12.21
블로그 이미지

Pulmaya

,